종로 낙원상가의 르네상스 왜?
지난 4월 12일 늦은 오후,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악기상가의 메카’라고 불리는 종로 낙원상가에는 빽빽하게 들어선 상점과 진열된 악기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악기 전문 매장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여기저기서 트럼본 부는 소리, 피아노 소리, 드럼 소리 등 악기를 테스트하며 나오는 여러 가지 음률이 낙원상가에 가득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의 연령대와 계층은 다양하다. 교복 입은 아이와 같이 온 학부모, 기타를 메고 몰려다니는 대학생, 백발의 중년 신사, 그리고 외국인 관광객까지 각자 관심 있는 악기의 쇼핑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중 유독 젊은 20대 여성 무리가 눈에 자주 띄었다. 기타를 크기별로 비교해 보며 상인과 가격을 협상하고 있던 김윤진(29)·김윤미(26) 자매는 “방송에서 기타 치는 것 보고 멋있어서 관심을 갖고 있다가 동생과 함께 배워 보기로 마음먹고 기타를 사러 나왔다”라며 “요즘 친구들 사이에 기타 배우는 게 유행”이라고 말했다.
20년 만에 찾아온 호황
최근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아날로그 음악 배우기 열풍에 낙원상가가 들썩거리고 있다.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세대를 넘어선 손님들이 몰려들자 낙원상가의 상인들은 “요즘 정말 바빠요”라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낙원상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라고 볼 수 있다. 1층에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를 도로가 가로지르고 있고 2, 3층에는 악기 상가 그리고 상위층에는 아파트로 구성돼 있다. 이곳 2, 3층에는 총 240개 악기 전문점이 자리 잡고 있다.
낙원상가는 1968년에 지어졌지만 1980년대부터 악기 매장들이 집결하기 시작해 약 30년째 음악인들의 성지로 명맥을 이어왔다. 1990년대와 2000년대 들어 인터넷, MP3 등 디지털 음악의 등장으로 옛 명성을 잃어 갔지만 2011년 들어 낙원상가는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악기를 배우려고 하는 이들이 대중적으로 급속도로 늘었기 때문이다. 낙원상가에서 16년째 기타와 바이올린 등을 판매하고 있는 그린악기의 임종업 사장은 “지난겨울부터 현재 4월까지 올해 유난히 손님이 많이 몰리고 있다”며 “매출이 전년 동기 2~3배는 늘었다”라고 밝혔다. “원래 매년 12월이 1년 중 매출이 가장 좋을 때예요. 겨울방학과 수능 끝나고 악기를 배워보려는 학생들이 많아서죠. 보통 매출 피크는 1월이 지나면 수그러드는데 올해는 4월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요즘 주말에는 눈코 뜰 새 없어요.”
낙원상가 2층의 주인들도 대부분 임 사장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악기 배우기 열풍이 불었을까. 낙원상가 상인들이 보는 최근 열풍의 가장 큰 이유는 대중 미디어 때문이다.
우선 젊은층 사이에서 악기를 배워 보려는 이들이 크게 는 것은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의 인기 때문이다. 많은 지원자들이 기타나 피아노를 수준급으로 연주하며 오디션 무대에 임했고 이는 또래 시청자들의 ‘워너비’ 욕구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남학생의 전유물이었던 통기타를 이제는 젊은 여성들이 많이 찾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슈퍼스타K 2’의 장재인이나 아이유의 통기타 연주가 기폭제가 된 듯하다.
한편 중·장년층 사이에서는 포크송의 추억을 불러일으킨 ‘쎄시봉’ 열풍이 있다. 낙원상가의 전성기였던 1970~1980년도에 이곳에서 통기타를 사고 배웠던 까까머리 세대가 이제는 흰머리 아버지가 돼서 다시 낙원상가를 찾고 있다.
낙원상가 기타 매장 앞에서 ‘잘빠진’ 기타를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던 김중각(53) 씨는 “젊은 시절 기타 실력이 꽤 수준급이였지”라며 “주말마다 가는 등산회에서 솜씨를 한번 뽐내 볼까 하고 작은 기타 하나 사러 왔어요”라고 밝혔다. 또한 수년 전부터 인기를 모았던 직장인 밴드 열풍도 많은 중년층을 낙원상가로 불러 모았다.
악기 배우기 열풍의 또 다른 배경은 동네마다 들어선 백화점과 마트의 문화센터 덕분이다. 최근 문화센터에서는 일반적으로 10만 원 미만의 수강료로 약 두 달 동안 기악 클래스를 수강할 수 있다.
이마트 문화센터는 인기가 높은 포크기타에서부터 플루트·바이올린·오카리나·하모니카·클라리넷·드럼·가야금 등 다양한 강좌를 개설해 놓고 있다. 이와 함께 인터넷 공간의 카페와 블로그에는 악기별로 다양한 강습 자료와 동영상이 잘 정리돼 있다는 점도 일반인들이 큰 결심 없이 악기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낙원상가의 최근 트렌드를 악기별로 살펴보면 일단 통기타의 부활이 있다. 그리고 색소폰과 우쿨렐레 등의 인기도 한몫하고 있다. 통기타는 연령 구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성별도 구분 없이 판매되고 있다.
낙원상가의 한 매장에 따르면 몇 년 전만 해도 일렉트릭 기타를 찾는 젊은층이 많았지만 이제는 아예 없고 대부분 통기타를 찾는다고 한다. 특히 휴대하기 편하거나 여성이 쓰기 좋은 작은 기타도 잘 팔리고 있다.
또한 주목할 만한 트렌드는 우쿨렐레다. 우쿨렐레는 코아 나무로 만든 악기로 하와이 음악에 주로 사용된다. 쉽게 몇 년 전 모 음료수 광고에서 이효리와 김C가 하와이안 복장을 하고 나와 연주했던 작은 기타를 떠올리면 된다. 100여 년이 훨씬 넘는 깊은 역사의 우쿨렐레는 현재 하와이는 물론 미국과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특히 일본에서 최근 10여 년 전부터 선풍적인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통기타·우쿨렐레·색소폰이 대세
우리나라에서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불과 1~2년밖에 되지 않았다. 우쿨렐레를 찾는 이들이 많아지자 낙원상가의 상점들은 일렉트릭 기타를 진열했던 벽면에 전면적으로 우쿨렐레로 바꿔 걸었다.
한 상점은 직접 우쿨렐레 강사를 초빙해 1주일에 2~3번 낙원상가 내 작은 연습실에서 강습을 하고 있었다. 또한 ‘우쿨렐레 구매 시 강습 DVD 제공’이란 간판을 내걸고 고객을 유인하는 상점도 있었다.
그린악기의 임 사장은 “일반 기타보다 코드가 단순해 배우기 쉬워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적다”며 “젊은 여성들이 많이 찾고 유치원 강사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칠 목적으로 대량 구입해 가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복병은 바로 색소폰이다. 색소폰 역시 다른 금관악기보다 배우기 쉽다는 점에서 지난 수년 전부터 동호인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낙원상가 관현악기 전문점 정일악기사의 이인의 사장은 “색소폰을 찾는 이는 모두 50대 이상으로 약 7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판매가 늘고 있다”고 말한다.
매주 주말이면 서초구의 양재천에는 색소폰 동호회 회원 20~30명이 모여 색소폰을 연습하고 연주하는 광경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장년층이 색소폰을 즐기고 있다. 국민적인 아날로그 악기 배우기 열풍에 오랜만에 호황을 누리고 있는 낙원상가 상인들은 이런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 적극적 노력이 필요할 때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낙원상가번영회는 음악인의 저변 확대를 위해 지난 2009년부터 매년 ‘낙원상가 직장인 밴드 경연대회’를 개최, 공연 모습을 담은 사용자제작콘텐츠(UCC)를 공모하고 결선을 인터넷으로 중계하는 등 마케팅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또한 콘서트나 팬 사인회 등 다양한 이벤트를 번영회 차원에서 준비하고 있다. 많은 상인들은 역사와 전문성이 있는 낙원상가가 용산전자상가처럼 국제적 명소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한다.
낙원상가에서 만난 캐나다인 캐시 노엘 씨는 “이렇게 다양한 악기가 한곳에 모여 있고 싼값에 살 수 있는 곳은 다른 나라에서 찾기 힘들다”며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한국 대중음악의 시작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진원 기자 zinone@hankyu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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