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병에 내몰린 ‘세계 관광산업의 원조’ 토머스 쿡

[영국] 9·11보다 더한 불황…인력 축소 비상
“올해 여행 업계는 9·11테러 이후보다 더 심각한 불황을 겪을 것이다.”

영국 여행 산업을 대표하는 업체인 토머스 쿡(Thomas Cook)의 최고경영자(CEO) 매니 폰텐라노보아가 최근 올해 여행 산업을 전망하면서 한 말이다.

항공 산업 역사상 최악의 참사를 기록하며 여행 업계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은 9·11 테러에 비할 정도로,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할 정도로 올해 영국, 나아가 유럽 여행 산업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토머스 쿡은 경쟁 업체 중 하나인 코업(Co-op)과 7 대 3 비율의 합병을 선언하고 지점 및 인력 감축에 나섰다. 토머스 쿡과 코업은 각각 영국 여행 업계에서 2위와 3위를 차지하는 업체들이다. 물론 유럽연합(EU) 독점규제법에 따른 최종 승인 과정을 남겨 놓고 있지만 벌써부터 시장에서는 이번 협상을 두고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유럽 재정 위기·화산재 파동 ‘악재’
<YONHAP PHOTO-0210> Passengers arrive at London's Heathrow Airport after flying in on a British Airways flight from Vancouver, the first to land at the airport after Britain's skies reopened late Tuesday April 20, 2010. Airlines rushed to reorganise schedules after the Civil Aviation Authority (CAA) eased the rules allowing a phased reopening of airspace following the closure due to Icelandic volcanic ash. (AP Photo/ Dominic Lipinski/PA )  **  UNITED KINGDOM OUT NO SALES NO ARCHIVE  **/2010-04-21 07:03:21/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Passengers arrive at London's Heathrow Airport after flying in on a British Airways flight from Vancouver, the first to land at the airport after Britain's skies reopened late Tuesday April 20, 2010. Airlines rushed to reorganise schedules after the Civil Aviation Authority (CAA) eased the rules allowing a phased reopening of airspace following the closure due to Icelandic volcanic ash. (AP Photo/ Dominic Lipinski/PA ) ** UNITED KINGDOM OUT NO SALES NO ARCHIVE **/2010-04-21 07:03:21/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일부에서는 규모의 경제 효과에 따른 긍정적 효과를 점치고 있다. 일부 시장조사 기관은 이번 합병 성사로 토머스 쿡의 주가가 10% 이상 상승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전망을 내놓았다. 1위 업체인 투이 트래블(Tui Travel)에도 상당한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또 다른 전문가들은 이번 합병이 영국 여행 업계가 이미 서바이벌 게임에 들어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비관적 분석을 내놓고 있다. 물론 두 회사는 이번 합병을 두고 ‘업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두 브랜드가 합병한 것’이라고 적극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 홍보 전략에 불과하다는 것이 여행 업계 내부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들의 얘기다. 오히려 시장 상황이 워낙 악화돼 떠밀리다시피 합병에 나선 것이라고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파다하다.

이러한 분석은 이번 합병을 통해 두 회사가 챙길 수 있는 비용 절감 효과만 보더라도 설득력을 갖는다. 두 회사는 합병 이후 지점 축소와 인력 감축을 통해 3500만 파운드 정도의 비용 절감 효과를 가져온다고 내다보고 있다. 올해 토머스 쿡 수익의 3배가 넘는 금액이다.

영국 사람들은 휴가 계획을 짤 때 아직도 인터넷 예약보다 오프라인상의 거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토머스 쿡과 코업은 합병에도 불구하고 1200개나 되는 오프라인 예약 데스크를 유지할 계획이다.

라이언 에어와 이지젯 등 저가 항공사들이 인터넷 예약·발권을 통해 경상비용을 대폭 줄여나가고 있는 마당에 임차료가 비싼 시내 한복판에 예약 데스크를 유지하는 사업 모델이 얼마나 지속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이번 합병으로 300명의 인력 축소 효과를 가져오는 등 어느 정도 시너지 효과를 내겠지만 이것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영국 여행 산업의 대표 선수 격인 토머스 쿡이 그만큼 절박한 상황에 내몰려 있다는 것이다.

토머스 쿡은 영국 여행 산업, 나아가 전 세계 패키지여행의 역사를 보여주는 업체다. 코업 역시 1905년 처음 여행업에 뛰어든 저력 있는 기업이다. 그러나 토머스 쿡은 여행 업체의 원조로 꼽히는 기업이다.

회사 창립자이자 ‘근대 관광산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토머스 쿡은 영국 중부 레스터 지방의 침례교 목사 출신이다.

19세기 중반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과도한 음주 흡연 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골치를 앓고 있었다. 교회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금주 및 절주 캠페인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 당시 토머스 쿡도 자신의 고향인 레스터에서 침례교 신도들을 모집해 11마일 정도 떨어져 있던 러버러 지역의 금주(禁酒) 예배를 하기 위해 기차 여행을 떠난다. 바로 이때 500명이 넘는 신도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기차표와 간단한 음식을 묶어 1실링에 판매했던 것이 오늘날 패키지여행의 효시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영국의 철도 회사는 토머스 쿡이 침례교 신도들이나 학생들을 모집해 오면 기차표를 싸게 판매하는 방식으로 본격적 패키지여행에 나서게 된다.

토머스 쿡은 150년의 역사를 거치며 유럽 내 2위 여행 업체로 성장한다. 2007년에는 경쟁 업체였던 마이 트래블(My Travel)을 합병해 토머스 쿡 그룹으로 회사 이름을 바꾼 뒤 런던 증시에 상장했다.

2009년에는 현재 모기업인 독일계 기업 아칸도르가 금융 위기 여파로 파산 신청을 냈지만 토머스 쿡만큼은 독자적으로 살아남아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렇게 영국 여행 산업, 나아가 세계 여행업의 역사를 써 온 토머스 쿡이 코업과 합병하면서 군살 빼기에 나서자 여행 업계 전반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라는 해석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여행 업계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된 것은 10월 들어서만의 일이 아니다. 영국 여행 업계는 지난 7월 이미 최대 패키지 업체인 골드트레일(Goldtrail)이 파산하고 중부 버밍햄에 본사를 둔 중견 업체 선포유(Sun4U) 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더욱이 두 회사의 파산 소식이 알려지면서 당시 수천 명의 여행객들이 해외에 발이 묶여버리는 바람에 여행 업계 전체의 신뢰가 추락된 경험도 갖고 있다.

그러면 올해 여행 업계는 왜 이렇게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었을까. 9·11 테러보다 심각하다고 평가되는 올해 여행 업계 불황의 원인은 ‘자연이 내린 재앙과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의 결합’이라는 말에 함축돼 있다.

자연이 내린 재앙은 지난 4월 유럽 항공 산업 전체를 마비시켜 버린 화산재 파동을, 그리고 인간이 내린 재앙은 유럽 각국의 재정 위기에 따른 경제 위축을 의미한다. 지난 4월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로 촉발된 화산재 파동은 유럽 대부분의 공항을 무려 6일 동안이나 폐쇄시킬 정도로 항공 산업에 직격탄을 날렸다.

게다가 잇달아 치러진 5월 영국 총선과 보수당의 과반수 확보 실패에 따른 연정 협상 등은 영국인들을 여름휴가 준비보다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당겼다.
<YONHAP PHOTO-0219> British Airways aircraft sit on the ground in this aerial view of Heathrow Airport in London, U.K., on Monday, March 29, 2010. British Airways Plc's cabin-crew union said it's no closer to returning to negotiations with management on the third day of a four-day strike by 12,000 workers over pay and staffing levels. Photographer: Simon Dawson/Bloomberg

/2010-03-30 06:2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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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tish Airways aircraft sit on the ground in this aerial view of Heathrow Airport in London, U.K., on Monday, March 29, 2010. British Airways Plc's cabin-crew union said it's no closer to returning to negotiations with management on the third day of a four-day strike by 12,000 workers over pay and staffing levels. Photographer: Simon Dawson/Bloomberg /2010-03-30 06:27:53/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지난여름 남아공 월드컵이라는 빅 이벤트 역시 여행 업계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본격적인 여름휴가철을 앞두고 월드컵이 열리면서 축구 중계라면 만사를 제쳐 놓는 영국인들의 휴가 수요를 잠식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게다가 5월 영국 총선 직후 집권 보수당 연정이 강력한 긴축정책을 천명하고 나서면서 경기 위축에 대한 불안감으로 소비자들이 주머니 열기를 두려워한 것도 올해 여행 산업 전반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런 일련의 이유들로 여행 업계에서는 ‘9·11 테러 당시보다 경기가 엉망’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계절적 요인이 가장 중요한 여행 업계 처지에서 보면 9·11 테러는 여름휴가철이 모두 끝난 다음에 발생했기 때문에 충격이 덜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강력한 긴축정책…장기 전망도 비관적

최악의 불황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마당에 그나마 최근 파운드화 대비 유로화가 약세로 돌아서면서 유럽 여행 수요가 다소 살아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스러운 대목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상황은 더욱 비관적이다.

재정 적자 누적에 따라 보수·자유민주당 연립정부가 강력한 긴축 드라이브를 걸면서 각종 복지 혜택을 줄여나가는 등 가계 지출을 압박하는 요인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이 생필품 구매도 줄이는 마당에 휴가비를 지출하기 위해 지갑을 쉽게 열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를 반영하듯 일간지 ‘가디언’이 여행업이 회복될 것인지를 묻는 온라인 설문 조사에서는 75%가 비관적이라고 응답했다.

영국의 겨울철은 잦은 비와 강한 바람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부유층들은 스페인 등 햇빛이 풍부한 나라를 찾아 겨울 휴가를 즐기기도 한다. 여행 업계가 올겨울 수요에 관심을 가져볼 만한 이유다.

그러나 얼마 전 정부가 발표한 육아 수당 축소안은 납세자의 상위 15%에 해당하는 부유층만을 겨냥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부유층 역시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이래저래 영국 여행 업계는 최악의 한 해를 보내야 할 판이다.

성기영 영국 통신원(워릭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 sung.ki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