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20년 동안 멀어졌던 거리](https://img.hankyung.com/photo/202102/AD.25527146.1.jpg)
나는 그런 아버지와 친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는 손을 잡아본 기억도 없다. 지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사람처럼, 때로는 아버지를 증오하기까지 했다.
아버지와 더욱 멀어진 계기는 중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취직한 누나가 첫 월급으로 내 생일 선물로 자전거를 사주기로 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내가 살던 동네를 떠나 더 넓은 세계로 마음껏 날아다니고 싶은 마음에 생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생일에 자전거는 없었다. 대신 TV 한 대가 거실을 장식하고 있었다. 나는 크게 실망했다. TV도 다른 가상의 세계로 나를 인도할 수 있었지만, 현실의 세계를 여행하는 내 꿈은 온전히 부서져 버렸다. TV는 내 선물이 아니었다. 그건 아버지를 위한 선물이었다.
아마 사춘기란 게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같다. 그때부터 삶에 대해 고민하고, 사색적인 소설을 끼적거리고, 분노를 쏟아내는 록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와는 더욱 멀어졌다.
나는 취직하고 1년 후에 첫 차를 샀다. 남색 세피아는 자전거만큼 나를 더 넓은 세계로 인도했다. 나는 그 차를 타고 여자 친구와 여행을 다녔고, 술에 만취하면 차 안에서 자곤 했다. 내 마지막 청춘이 고스란히 그 차에 담겨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차를 빌려달라고 했다. 그동안 운전면허가 없었는데, 직장에서 은퇴한 후 시간이 생겨 운전 연습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면허가 없어서 안 된다고 잘라 말하고는 내 방문을 닫았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파트 주차장에 내 차가 없었다.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아버지가 몰고 나갔다는 것이다. 나는 동네를 몇 번 돌고 온 아버지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요.”
나는 그렇게 화를 낸 후, 면허가 없이 운전하다 사고 나면 큰일 난다고 화를 낼 때보다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당황한 듯하면서, 묵묵부답이었다. 그러고는 힘없는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고 아버지는 집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주차장에서 쓸쓸하게 들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들었다. ‘내가 복수한 것일까. 동네 몇 바퀴 돈 걸 가지고 내가 너무한 건 아닌가? 하지만 면허 없이 운전하는 건 안 될 일이잖아.’
그날 이후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친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년 동안 멀어지기만 했던 거리도 조금 가까워진 듯했다.
그 후 나는 결혼했고 아들을 낳았다. 나는 아버지처럼 잔소리와 명령을 늘어놓는 아버지가 되기 싫었다. 친구처럼, 동지처럼 지내고 싶었다. 그러한 노력은 대체로 좋은 성과를 낳았다. 아들은 나를 친구처럼 서슴없이 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친구 같은 아버지의 부작용도 있었다. 아들은 짜증이 나면 나한테 화풀이를 한다. 이럴 때는 친구 관계가 아니라 상하관계가 된 느낌이다. 여기서는 아들이 위다.
내가 평생 동안 단 한 번, 아버지에게 큰소리를 낸 데에 비해 아들은 자기가 원하면 언제든지 큰소리를 친다. 그럴 때면 나는 이상하게도 내 아버지와 두 발짝 정도 가까워진 것을 느낀다.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란다. 조만간 아들은 나에게 반항할 수 있다.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면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밥 먹을 때 외에는 밖에 나오지 않는 심술 맞은 사춘기. 그러한 10대의 반항은 유치원 아이의 투정과는 질적으로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아마도 그때가 되면 내 아버지와 열 걸음 정도 가까워졌을 게다.
![[아! 나의 아버지] 20년 동안 멀어졌던 거리](https://img.hankyung.com/photo/202102/AD.25527148.1.jpg)
1969년생. 94년 고려대 심리학과 졸업. 94년 여성 월간지 ‘여원’ 기자. 1996년 남성 월간지 ‘에스콰이어’ 기자. 2002년 여성 월간지 ‘퀸’ 기자. 2008년 시사 주간지 ‘일요신문’ 기자. 피부과 성형외과 전문 월간지 D&PS 편집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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