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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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피난처로 이름을 날리던 산마리노가 죽음을 맞고 있다.”(이탈리아 일간 라 스탐파)

스위스나 리히텐슈타인 등과 함께 유럽의 대표적인 자금 피난처로 알려진 산마리노가 글로벌 금융 위기와 이탈리아 당국의 지속적인 탈세 단속으로 궁지에 몰렸다.

이탈리아 일간 라 스탐파는 최근 “그동안 주로 이탈리아인들이 탈세 자금을 맡겨 왔던 산마리노공화국의 12개 은행이 이탈리아 정부의 지속적인 관리와 압력을 받아 어려움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이탈리아 중앙은행은 정부의 ‘탈세와의 전쟁’ 방침에 맞춰 산마리노 은행들의 주 거래처인 이탈리아의 리미니 은행을 급습, 불법 돈세탁에 관련된 돈의 흐름을 추적했다.

이 같은 이탈리아 정부의 초강경 조치로 ‘산마리노가 조세피난처로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이 이탈리아 사회에 빠르게 퍼지면서 이탈리아에서 산마리노 은행으로 빠져나가는 돈의 규모도 35%가량 줄었다. 이뿐만 아니라 산마리노 은행 금고 안에 쌓여 있던 140억 유로 규모의 기존 예금 중 60억 유로(9조6000억 원)가량이 순식간에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탈리아·독일 등 조세피난처와 전면전

이탈리아 아펜니노 산맥 티나노산 산자락에 있는 인구 3만1000여 명에 불과한 작은 독립국가 산마리노는 관광과 금융업이 주 수입원인데 외부 자금 유입이 뚝 끊기면서 최대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국토 면적 60㎢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이기도 한 산마리노는 1960년대 이후 관광 중심지로 성장했고 1990년대 조세피난처로 알려지기 시작하며 외부 자금을 끌어들이는 ‘금융 블랙홀’ 역할을 해 왔다.

나라는 작지만 4개의 대형 은행, 59개의 각종 소규모 금융회사, 8개의 준은행기구 등 70여 개 금융 조직이 활발하게 금융거래를 해 왔다. 산마리노에서 유통되고 예치된 전체 금액의 90% 가까이가 해외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이탈리아와 독일 정부 등이 대대적인 탈세 단속에 나서고 조세피난처로 불리던 스위스·산마리노 등과 전면전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조세피난처들이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해 탈세 혐의자 정보 공개에 비협조적인 국가를 의미하는 그레이 리스트(gray list)에 산마리노를 등재하면서 세계 각국의 산마리노에 대한 견제가 본격화됐다. 그리고 이어진 이탈리아 정부의 금융 엠바고 조치가 결정타가 됐다.

이탈리아가 지난해 ‘탈세와의 전쟁’을 통해 거둬들인 돈은 75억 유로(12조5000억 원)에 달했다. 탈세자에 대한 사면 제도 덕분에 해외에 은닉돼 있던 800억 유로(130조 원) 이상의 자산도 정체가 밝혀졌다. 이탈리아 정부는 이들 자산에 5%의 세율을 부과해 40억 유로(6조5000억 원)의 세금을 추징했다. 800억 유로는 이탈리아 국내총생산(GDP)의 약 5%에 해당한다.

한편 산마리노는 잇단 악재로 올해 약 8000만 유로(1280억 원)의 재정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내년에는 적자 폭이 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산마리노 안팎에선 “산마리노가 국제통화기금(IMF)에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안토넬라 물라로니 산마리노 외교장관은 “현재 산마리노는 은행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며 “산마리노는 이탈리아 정부와 전적으로 협력할 의향이 있으며 이탈리아 은행들이 조사를 원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정부의 금융 엠바고 조치에 사실상 ‘백기 투항’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한때 검은돈이 물밀듯이 밀려들며 전 국민이 풍요로운 복지 혜택을 누리고 각종 향락 산업이 발전했던 산마리노는 순식간에 쓸쓸한 퇴락의 길에 접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김태완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tw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