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에 부는 새바람 ‘트리즈 경영’ 현장
요즘 포스코에는 트리즈(TRIZ) 바람이 불고 있다. 포스코 임직원은 누구나 올 초 문을 연 사내 트리즈대학의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아예 트리즈를 전문으로 하는 대학을 설립한 것이나, 연구·기술 분야에서만 일부 알려져 있던 트리즈 기법을 사무직을 포함한 전체 임직원들에게 배우도록 한 것은 세계적으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구소련에서 개발돼 비밀스럽게 전파돼 온 ‘창조적 문제 해결 방법론’ 트리즈가 포스코 3.0의 핵심 도구로 뒤늦게 꽃을 피우고 있는 셈이다. 포스코 생산성연구센터 권민경 대리는 깨알 같은 글씨와 그림이 빼곡한 노트 한 권을 꺼내 보였다. 요즘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작성하고 있는 ‘트리즈 아이디어 노트’다.“지금까지 ‘아이디어’라는 단어는 저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으로 알았어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트리즈를 배우고 나니 이처럼 다양한 상상력이 제 안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에 저 자신도 놀랄 때가 많아요.” 이는 비단 권 대리의 경우만은 아니다. 최근 포스코에는 트리즈가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 포스코의 명소가 된 창의 놀이방 포레카에 트리즈룸이 등장했고, 트리즈대학까지 만들어졌다. 정준양 포스코 회장이 신년사에서 트리즈를 창조적 혁신의 도구로 선언한 후 일어난 변화들이다.
정 회장은 먼저 국내에서 트리즈를 가장 잘 활용하는 기업으로 꼽히는 삼성전자에서 김세현 생산성연구센터장(상무)을 스카우트했다. 김 센터장은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가치혁신프로그램센터(VIP센터)’에서 오랫동안 혁신 업무를 담당했으며 2006년 삼성그룹 주요 전자 계열사들이 참여하는 ‘삼성트리즈협회’ 설립을 주도해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포스코가 외부에서 임원을 수혈한 것은 1968년 회사 설립 후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 김 센터장은 트리즈대학 학장을 함께 맡고 있다. 지난 2월 문을 연 이 대학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파격이다.
이는 트리즈보다 훨씬 잘 알려진 식스시그마의 이름을 단 식스시그마대학이 없는 것만 생각해 봐도 잘 알 수 있다. 김 센터장은 “트리즈대학은 실무진이 아니라 정 회장님이 직접 아이디어를 냈다”고 말했다.
세계 최초 트리즈대학 문열어
트리즈대학은 정 회장이 취임 후 역설해 온 ‘창조적 혁신’을 이끌어갈 인재 육성의 산실이다. 정 회장은 포스코의 현재 상황을 위기로 진단한다. 우선 현대제철의 당진 일관 제철소가 가동을 시작하면서 포스코의 오랜 독점 체제가 사실상 막을 내렸다. 해외에서는 중국 철강사들의 광폭 약진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세계 철강사 순위 10위 안에 중국 철강사가 5개나 포진해 있다. 정 회장은 이러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자신의 경영 철학을 ‘업(業)·장(場)·동(動)’이라는 3가지 개념으로 요약해 제시하곤 한다.
‘업’은 기존의 철강이라는 본업을 진화시켜 다양한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히자는 것이다. 반면 ‘장’은 글로벌화를 함축한다. 사업의 장을 전 세계로 넓히자는 것이다. 최근 포스코가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사업들은 모두 이 틀로 설명된다.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일관 제철소 프로젝트, 조명용 발광다이오드(LED)와 연료전지, 스마트 그리드, 스마트 원자로 등 신규 사업 진출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동’, 즉 일하는 방식의 혁신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김 센터장은 “철강 분야에서 경쟁사들을 압도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기존 사업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사고가 절실한 시점”이라며 “트리즈가 만능열쇠는 아니지만 그런 측면의 경쟁력을 확보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트리즈대학은 포항에 있는 포스코 미래창조아카데미(옛 인력개발원)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실제 교육은 서울·포항·광양에서 나누어 진행된다. 전체 운영과 관리는 생산성연구센터 트리즈연구반이 담당하고 실제 교육은 포스코의 교육 전문 계열사인 포엠아이컨설팅이 진행한다.
포스코와 포스코 패밀리사(계열사) 전체 임직원이 교육 대상이다. 트리즈대학 출범 후 최근까지 포스코 임직원 1800명 가까이가 교육과정을 마쳤다. 전 직원의 10%가 넘는 인원이다. 교육 프로그램은 임원과 챔피언(부장급), 팀리더·공장장(차장급), 엔지니어·연구원, 기타 일반직 등으로 나눠 진행된다. 임원과 챔피언 과정은 8시간, 팀리더·공장장 과정은 16시간(2일), 엔지니어·연구원과 기타 일반직 과정은 24시간(3일)짜리로 짜여 있다.
정해진 교육을 이수하면 트리즈 ‘레벨1’ 인증을 받을 수 있다. 이보다 한 단계 높은 레벨2(심화과정, 2주)와 레벨3(전문가과정, 3주)을 받으려면 다양한 과제 해결 능력을 갖춰야 한다. 김 센터장은 “레벨 인증을 받으면 인사 가점이 주어진다”며 “승진 시 인센티브가 된다”고 말했다.
트리즈 배우기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의미 있는 성과도 속속 나오고 있다. 올 초 생산성연구센터 트리즈연구반은 30년 묵은 고민거리를 해결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광석 저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원료 손실을 줄여달라는 것이었다.
제철소에는 사일로라는 원료 임시 보관소가 있다. 철광석을 일정한 덩어리 형태로 구워 만든 소결광을 저장했다가 고로에 공급하는 일종의 곳간 역할을 하는 곳이다. 문제는 애써 만든 소결광을 사일로에 쏟아 부을 때 낙차에 따른 충격으로 전체 원료의 30%가량이 잘게 부서져 쓸모없게 돼 버린다는 다는 것이다.
제철소가 생긴 이후 수많은 소결 공장 담당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무려 25m에 달하는 낙차를 줄이려면 사일로 길이를 줄여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장 용량이 줄어 사일로 숫자를 늘려야 하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현장에 출동한 트리즈연구반은 몇차례 회의 끝에 놀라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오홍석 포스코 생산성연구센터 트리즈연구반 과장은 “그동안 낙차를 줄이려면 사일로 크기를 작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해결책을 찾지 못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트리즈연구반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사일로의 벽에 구멍을 뚫자는 것이다. 1번 사일로에 소결광이 어느 정도 차면 이 구멍을 통해 자연스럽게 흘러 내려 2번 사일로에 쌓이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각각 분리된 사일로에 소결광을 부을 때보다 낙차가 크게 줄어들어 분율(가루가 되는 비율)이 훨씬 낮아진다.
오 과장은 “동일하거나 연관된 기능을 수행하는 것들을 합치라는 트리즈의 발명 원리 5번 ‘통합’을 적용한 사례”라고 말했다. 포스코는 이 아이디어 하나로 연간 63억 원을 절감할 수 있게 됐다.
압연과 권취 공정에서 발생하는 플라잉(Flying)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트리즈가 위력을 발휘했다. 포스코의 철강생산 공정은 홍두깨로 밀가루를 밀면서 얇게 펴는 것과 유사하게 두꺼운 철판을 롤러에 넣고 얇게 펴는 압연 공정과 이렇게 얇게 펴진 철판을 둥글게 돌돌 감는 권취 공정으로 이어진다.
플라잉 문제는 이때 압연기를 너무 빠르게 하면 발생한다. 압연 속도를 빠르게 하면 그만큼 생산성이 높아지지만 얇게 펴진 철판들이 너무 빨리 연속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가장자리가 울퉁불퉁하게 찌그러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철판들이 고르게 나오지 않고 울퉁불퉁하게 나오는 것이 마치는 날아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플라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가장 손쉬운 해법은 플라잉이 발생하는 않는 수준까지만 압연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생산성을 양보하는 일종의 타협책인 셈이다. 그동안 포스코는 이 정도 해법에 만족해 왔다. 하지만 트리즈는 적당한 타협 대신 가장 이상적인 최종 해법을 추구한다.
과연 생산성과 플라잉 문제를 모두 잡을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은 없을까. 이 과제를 받은 팀들은 트리즈의 ‘작은 사람 모델(Smart Small Person Model)’을 활용해 난제를 해결했다.
작은 사람 모델은 문제 상황을 수많은 난쟁이에 의해 이뤄진다고 상상하는 일종의 의인화 기법이다. 여기서는 압연과 권취 공정을 거치는 동안 작은 난쟁이들이 철판을 들고 움직인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플라잉 현상은 철판을 든 난쟁이들이 순간적으로 손을 놓치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를 막으려면 손을 놓치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 오 과장은 “롤러를 빠르게 하거나 느리게 하거나 두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며 “구간과 시간을 나눠 롤러 속도를 가변적으로 하면 플라잉 현상이 사라진다”고 말했다. 이 아이디어는 최근 포스코 내 최고의 기술상인 제철기술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기업들은 다양한 경영 혁신 기법들을 도입해 활용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식스시그마’다. 포스코는 식스시그마를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한 곳 중 하나다. 지금도 식스시그마를 포스코에 맞게 변형한 ‘퀵식스시그마’가 사내 혁신 활동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과연 식스시그마와 트리즈는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일까.
김 센터장은 “식스시그마가 일하는 방법과 프로세스에 관한 것이라면 트리즈는 창의적 사고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식스시그마는 작업 프로세스를 개선해 주어진 목표를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창조적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동반 성장 위해 중소기업에 트리즈 전파 계획도 물론 트리즈가 식스시그마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 센터장은 “식스시그마에서 과제를 해결하는 단계 중 개선과 분석 단계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며 “트리즈가 이 단계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센터장은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트리즈가 식스시그마에 내재화되는 ‘트리즈 인사이드’를 주장한다.
최근 포스코의 트리즈 프로그램 중에는 한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 전통적인 공학·기술 분야 뿐만이 아니라 마케팅·전략 등 경영 전반으로 트리즈의 적용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트리즈의 원리를 비즈니스 영역을 확장해 최근 주목받고 있는 ‘비즈니스 트리즈’다.
김 센터장은 “임원을 대상으로 한 트리즈 교육에서 다양한 비즈니스 적용 사례를 소개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며 “기술적인 문제를 푸는 것과 경영상의 전략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포스코는 11월 5일 그동안의 트리즈 성과를 발표하는 ‘2010 트리즈 콘퍼런스’를 개최한다. 조만간 트리즈의 발상지인 러시아의 트리즈 전문가 2명도 정식 채용할 예정이다.
포스코는 동반 성장의 일환으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트리즈 보급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김 센터장은 “1차 목표는 포스코와 포스코 패밀리에 트리즈가 확산되도록 하는 것”이라며 “이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면 2차, 3차 협력사들을 대상으로 한 트리즈 보급 프로그램도 개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트리즈란?
트리즈(TRIZ)는 ‘창조적 사고의 방법론’을 뜻하는 러시아어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1956년 소련 해군 특허청에 근무하던 겐리히 알츠슐러가 전 세계 특허 250만 건을 분석해 완성해낸 발명의 방법론이다.
1990년대 초반 소련이 무너지자 미국 기업들은 소련의 트리즈 전문가들을 가장 먼저 스카우트해 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소련의 국가 기밀이던 트리즈가 기업 경영에 본격적으로 접목되기 시작했다.
트리즈는 ‘모순 개념’, ‘40가지 발명 원리’, ‘76가지 표준해’, ‘창의적 문제 해결 알고리즘(ARIZ)’ 등 방대한 이론 체계로 구성돼 있다. 세계트리즈협회를 중심으로 엄격한 전문가 인증 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최근 포스코 생산성연구센터 강영주 차장이 비러시아계로는 최초로 ‘트리즈 마스터’에 올랐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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