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무뚝뚝한 뒷모습
대한민국 아버지들이 그렇듯이 아버지는 부르기도 어려운 분이셨다. 공무원 생활을 하신 까닭인지 공사 구분이 분명하셨으며 원칙과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을 매우 싫어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강하고 완고한 분이라고만 생각했던 내가 요즘은 아버지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에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고 있다. 경상도 사나이답게 퇴근 후 귀가하시면 가족들의 안부만 간단하게 물으시고 돌아서서 옷을 갈아입던 아버지의 무뚝뚝한 뒷모습, 내 아이들의 기억 속에도 내 뒷모습이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눈가가 촉촉해진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2~3년에 한 번씩 전근을 가셨고 나를 비롯한 가족들은 잦은 이사와 전학으로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친구들과의 이별은 어린 내겐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국가관이 투철했던 아버지는 늘 국민의 공복(公僕)이라는 자부심에 내 불만을 들어주시기보다 정직과 청렴에 대한 당부만 하셨다.

물론 나는 아버지의 바람을 이루어 드렸다. 당당히 철도청 공무원으로 합격한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청소년기의 방황은 누구에게나 한번쯤 찾아온다고 하지만 나는 조금 특별했다.

나는 아버지의 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일부러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전의 철도 계통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내 속마음을 몰랐던 아버지는 철도 계통 공무원이 될 것으로 기대하시고 무척 대견해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뿐이다.

나는 고등학교 진학 후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벗어나 불량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학업보다 운동에 매진하며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어느 날 집에서 하숙집으로 연락이 왔고 나는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숙집 주인아저씨(이분은 내게 좋은 말씀을 참 많이 해주셨다)가 내 방황을 걱정한 나머지 집에 연락하신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조용히 아버지를 뒤따라 걸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는 잠시 걸음을 멈추신 후 먼 산을 바라보셨는데 그때의 뒷모습은 내 생각에 못난 아들로 인해 눈물을 흘리셨던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던 나는 지금까지도 진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순간 불현듯 방황의 시간을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소리 없이 나를 변화시켰다. 나는 학업에 매진하며 기관사라는 꿈을 갖게 되었고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공무원이 된 후에도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나는 늘 무릎 꿇고 삼강오륜을 비롯한 예절과 윤리에 대한 아버지의 훈계를 들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아버지가 무섭지 않았고 오히려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웠다. 마냥 열정적이실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였는데….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몹시 쇄약해지시더니 어느 순간 완고하고 당당하던 모습까지 보여주시지 않았다. 이제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건 틀니와 보청기,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을 변함없이 경청하는 것뿐이다.

어느덧 아버지는 아흔을 훌쩍 넘기셨다. 그래도 여전히 자식 걱정에 여념이 없으시다. 젊은 시절 가족들에게 표현을 못하셨던 것이 못내 아쉬우신가 보다. 나 역시 나의 아이들에게 무뚝뚝한 아버지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요즘 거울을 보며 표정 관리를 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언젠가부터 거울 속에 비친 나는 아버지처럼 보인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한고비씩 넘기고 나면 나는 아버지에 대한 감사함과 연민으로 눈이 충혈되곤 한다. 그 시절 당신께서 뒤돌아서서 옷을 갈아입으셨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대한민국 아버지는 등으로 울기 때문이다.


[아! 나의 아버지] 무뚝뚝한 뒷모습
최재숙 서울9호선운영 사장


1949년 경북 김천 출생. 1967년 철도청 대전기관차사무소 기관조사. 1979년 서울메트로 기관사. 1994년 서울메트로 승무팀장. 2003년 서울메트로 운영본부장. 2005년 서울메트로9호선(주) 부사장. 2007년 서울9호선운영(주) 사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