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약에 지친 일본인들의 새 소비 트렌드

“아껴야 잘살죠.”

더 이상은 아니다. 일본이 절약에 지쳤다. 푼돈 몇 푼 아끼자고 기꺼이 소비 욕구를 포기하던 움직임은 옛말이 됐다. 당장 저축률이 사상 최저치(2.3%)다. 1970년대 20%였던 것을 감안하면 거의 10분의 1로 줄어든 셈이다.

금융 위기 이후 선진국 가계가 소비 억제로 저축 비중을 늘린 반면 일본은 저축이 늘지 않았다. 절약에 지쳤기도 했지만 저축 재원(가처분소득)마저 줄어든 결과다. 최근 선진국 중 저축·소득의 동반 축소 사례는 일본이 유일하다.

결국 ‘일본=저축대국’은 무너졌다. 그렇다고 ‘절약→사치’의 과잉 소비도 없다. 소비할 돈이 없는 데다 노후 불안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택한 게 ‘작은 사치’다. 가격·품질을 조금씩 업그레이드해 만족도를 극대화하는 식이다.

업계도 저가가 최고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기 시작했다. 소비자의 가치관·구매 행동이 변함에 따라 이에 걸맞은 새 전략 마련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업계는 이 소비 행태를 ‘절약 피로’라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 ‘저가 PB’ 대신 ‘프리미엄 PB’ 인기 몰이
실제 금융 위기 이후 최근 1~2년간은 곳곳에서 ‘작은 사치’의 파워를 확인할 수 있다. 예전이라면 팔리기 힘든 고가 지향의 제품·서비스가 요즘 잘나가고 있다. 더욱이 경기 회복이 본격적이던 올해부터 이 경향이 강해졌다.

단적인 예가 택시 이용 증가다. 택시는 소비 항목 중에서도 비교적 고가 지출에 해당한다. 교통비가 워낙 비싸기 때문이다. 택시비만 아껴도 가계에 부담을 상당히 덜 수 있다. 웬만하면 타지 않는 교통수단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그랬던 게 달라졌다.

택시 이용이 조금씩 증가하는 대신 철도·버스 이용 고객이 줄어드는 추세다. 비용 때문에 주저했던 외식 비중도 증가세다. 여전히 지배적인 것은 저가 지향이지만 고급 메뉴 판매 비중도 부쩍 높아졌다. 외식 장소도 고가 형태로 바뀌는 모습이다.

원 코인(One Coin) 마케팅처럼 한 끼 500엔대 이하의 규동과 라면 등 서민 체인에서 비교적 고가인 회전 스시, 패밀리레스토랑 등의 외식 수요로 확산 중이다. 금융 위기 이후 미국 소비자가 절약 추구로 돌아서고 부유층조차 쿠폰 활용 구매 증가가 목격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가격 경쟁보다 품질 경쟁으로
[일본] ‘저가 PB’ 대신 ‘프리미엄 PB’ 인기 몰이
작은 사치는 마트와 슈퍼마켓 등에서 본격적이다. 즉 작은 사치 덕분에 프라이빗 브랜드(PB:Private Brand) 상품이 가고 제조업체 브랜드(NB:National Brand) 상품의 시대가 다가왔다는 평가다.

실제 저가 상품의 대명사인 PB 상품의 인기는 완연히 하락세다. PB 상품의 빈자리는 NB 상품이 채운다. NB는 메이커 이름으로 팔리는 전국 공통 상품인 반면 PB는 유통업자 요구에 맞춘 주문 형태로 NB보다 10~30% 저렴하다. 식품 분야에 PB 상품이 본격화된 건 2008년부터다.

세계적인 원재료 가격 급등에 대응해 초저가에 포커스를 맞춘 PB 상품을 내놓았는데, 이게 초대형 히트를 쳤다. 작년엔 PB 시장이 20%가량 성장하며 전체 식품에서의 시장점유율이 8%까지 올라갔다. PB 상품의 저가 전략은 중간유통·판촉비용이 빠지기 때문에 가능했다. 작년엔 유통업계 요구에 따라 가격이 더 떨어진 초저가 PB 상품도 대량으로 쏟아졌다.

NB 상품보다 이윤 폭이 적은 PB 상품도 나오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소비자의 절약 피로가 제공했다. 처음엔 불황 대응 차원에서 저가의 PB 상품을 애용했지만 변화 없는 제품 구성과 절약에 대한 반발감이 합쳐지며 PB 제품이 고객의 눈길을 잡는데 실패했다.

당장 유통업체가 절약 지향, 저가 제품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다. 대안은 작은 사치의 변화 흐름에 올라타는 것이다. 2~3년 전부터 사활을 걸고 PB 경쟁에 뛰어든 유통업체들이 지금은 오히려 PB 상품 라인업을 줄이는데 열심이다.

약 5000개 품목의 PB 상품(톱밸류) 라인업으로 유명한 이온은 올해부터 PB 상품을 10% 줄이기로 했다. 이온그룹 전체로 보면 올 3~5월 PB 판매액은 2.5% 증가하는데 그쳐 전년 동기 30%에 한참 못 미쳤다. 도큐스토어도 비슷한 추세다. 판매량이 적어 PB 상품 중에서도 적자를 내는 품목이 많기 때문이다.

세븐아이홀딩스도 PB 상품 매출 하락에 고전 중이다. 대안은 ‘프리미엄 PB 상품’으로 요약된다. 절약 피로로부터 비롯된 작은 사치에 호응한 고급화의 길이다. 프리미엄 PB는 NB보다 가격이 싸면서 PB보다 품질이 우수한 제품을 뜻한다. NB 상품과 비슷한 가격대까지 올라선 프리미엄 PB 상품까지 있다.

가을 시즌을 맞아 유통 현장 곳곳에서 가격 인상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배경이다. 일례로 이온은 NB 평균가보다 40% 비싼 278엔의 카레를 발매 중인데 인기가 꽤 좋다. 다만 PB 상품의 고급화는 중소형 메이커로선 악재다. 연구·개발비도 적은데 품질 향상의 고부가가치까지 실현하자면 대형 경쟁사보다 불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은 사치에 행복감 느껴
[일본] ‘저가 PB’ 대신 ‘프리미엄 PB’ 인기 몰이
실제 조사 결과도 작은 사치의 흐름을 반영한다. 상반기 식품산업 동향조사(일본정책금융공고)에 따르면 일본 소비자의 상품 지향성은 경제성보다 안전성이 최우선으로 고려됐다.

저가 선호보다 안전·건강·간편성 등이 중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식품의 경우 맛과 원산지, 국산 등에 일정 부분 지향 의지가 높은 가운데 저가격에서 부가가치로 방향 전환이 이뤄졌다.

소비자의 절약 피로는 그간 가격 경쟁에 열중했던 식품 산업이 최근 저가 피로를 호소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전년 대비 조사 결과를 보면 안전성(43.3%→46.6%), 맛(23.1%→26.3%), 원산지(23.0%→24.2%), 간편성(7.6%→11.9%) 등의 지향성이 강조됐다. 반면 저가격(43.4%→40.7%), 건강·미용(13.6%→7.8%) 등은 우선순위가 다소 떨어졌다. 지난여름 보너스가 다소 늘어난 것도 절약 피로감을 높인 원인으로 꼽힌다.

샐러리맨 설문 조사(손보재팬DIY생명)에 따르면 보너스 증가 세대는 작년보다 20.2% 늘어난 40.8%로 집계됐고 평균 금액은 67만 엔으로 약 1만5000엔 증가했다. 보너스 사용처로 저축(74.2%)이 압도적인 가운데 작은 사치에 쓰겠다는 응답도 전년의 14.2%에서 28.4%로 늘어났다. 외식·쇼핑 등을 통해 절약 피로를 풀 수 있는 작은 사치 소비 경향이 확인된 것이다.

소비자 1만 명 대상의 가치관과 구매 행동의 변천 결과도 비슷하다(노무라종합연구소, 2009년). 지갑 사정에 맞춘 저가 고집에서 작은 사치를 통한 만족 추구가 보다 강조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먼저 국산 지향이 높아졌다.

2000년 32.7%에서 2009년 52.2%로 상승했다. 품질·안전 지향이 반영된 결과다. 2008년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된 중국산 등 해외 식품의 안전성 문제가 원인이다. 경제성 이외 가치에 주목하는 움직임도 높아졌다.

싸고 경제적인 것을 산다는 응답이 50.2%에서 45.4%로 감소했다. 반면 대형 소비는 소극적이다. 자동차·여행 등 대형·고가 상품 소비 의향의 감소세다. 자동차는 2003년 13.8%에서 2009년 10.7%로, 여행은 각각 46.6%에서 35.4%로 줄어들었다.

대신 식료품·교제비 등의 적극적인 소비 의향이 높아졌다. 이는 결국 높아진 품질 의식으로 요약된다. 단순히 싼 것만 추구하지 않되 가격을 생각하면서도 품질이 좋거나 약간 사치한다는 기분을 느끼는 품목의 인기 비결이다.


돋보기 기업들의 마케팅 전략

‘절호의 찬스’…가격 전략 수정

소비자의 절약 추구는 결국 제품에 대해 회의·타성적 태도와 함께 최소한의 기대와 무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구매 행태를 낳는다. 제품 특유의 가치보다 가격 측면이 최우선 판단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절약 피로에서 절약 탈피로의 전환 신호는 기업으로서는 절호의 찬스다. 적절한 마케팅이 동반되면 장기화된 절약 추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리서치종합연구소는 절약 피로의 상황 변화에 걸맞은 마케팅 전략으로 가격 전략의 수정과 구매의 정당성 등을 강조하라고 조언한다. 가격 전략의 수정은 맥도날드의 100엔짜리 햄버거처럼 참조가 되는 가격을 설정하는 게 유효하다. 품질·가격의 2가지 가치로 완성되는 소비 만족도가 상대적이란 점에서 절대적인 기준가격을 제시하면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100엔짜리 햄버거로는 경쟁사 유사 제품과 비교해 가격을 어필하고 쿼터 파운드로는 저가 메뉴와 비교해 품질 만족도를 높이는 게 대표적이다. 품질·가격을 둘러싼 명확한 메시지를 제공하자는 얘기다. 구매의 정당성 부여는 고소득층이 고가 소비에 죄악감을 느끼지 않고 환경·건강 측면에서 어필할 수 있는 상품을 내놓는 게 방법이다.

전영수 게이오대 경제학부 방문교수change4drea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