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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화유산에 코카콜라 광고판이라니….”

국제 주요 박물관과 각종 문화단체, 문화계 유명 인사들이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주요 역사 유적들이 광고판의 대습격을 받고 있다며 대책을 촉구하고 나섰다. 더욱이 이탈리아 정부가 베네치아의 유명한 두칼레 궁전에 각종 광고판 설치를 허용한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최근 “세계 문화계의 지도적 전문가들이 이탈리아 정부가 베네치아 주요 문화유적지에 광고판 설치를 허용한데 대해 강력히 규탄하며 반대 서명 운동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광고판으로 뒤덮인 이탈리아 문화유산
영국 대영박물관 관장을 비롯해 뉴욕현대미술관장, 저명 건축가 노먼 포스터 등이 산드로 보니 이탈리아 문화부 장관에게 유적지 광고판 설치 허가를 철회하라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유적지 광고판 설치는 당신의 눈을 망칠 뿐만 아니라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유산을 황폐하게 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에는 보스턴박물관과 독일 드레스덴박물관, 스웨덴 스톡홀름박물관, 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 관계자들도 동참했다. 편지는 이탈리아 정부의 조치가 계속될 경우 유네스코가 지정한 베네치아의 세계 문화유산 지위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광고판 설치 현행법 위반 가능성도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했던 프랭크 게리, 램 쿨하스 등 유명 건축가들도 광고판에 대해 “보기 흉하고, 깜짝 놀랄만한 조치”라며 불쾌감을 표했다. 이들 문화계 인사들은 “매년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1750만 명의 관광객들이 실망 속에 돌아갈 것”이라며 경제적 효과도 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네치아 시정부는 재정난으로 2008년부터 산마르코 광장과 대운하 주변의 옛 궁전 등에 광고판 설치를 허용했다. 광고 수익금 등으로 유적지 개·보수와 유지비용을 충당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베네치아의 상징인 두칼레 궁전에 대형 불가리 광고와 코카콜라 광고 등이 들어서자 여론이 급격히 악화됐다. 베네치아공국 시절 베네치아 공작(독사)의 거주지였던 두칼레 궁전은 운하의 도시 베네치아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더욱이 두칼레 궁전 바로 앞에 유명한 탄식의 다리를 배경으로 대형 광고판이 건물을 뒤덮어 버리자 ‘탄식의 다리(Bridge of Sighs)’는 순식간에 관광객들 사이에서 ‘광고의 다리(bridge of signs)’라는 조롱 섞인 별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두칼레 궁전 벽면을 뒤덮은 광고판 이용료는 한 달에 4만 유로가량인 것으로 알려졌다.

알도 레아토 베네치아 곤돌라협회 회장은 “곤돌라에 관광객을 모시고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두칼레 궁전이 어디 있죠’라고 묻곤 한다”며 “그럴 때마다 ‘저기 광고판 뒤에 숨어 있는 게 두칼레 궁전입니다’라고 답변해야 해 무척 곤혹스럽다”고 말했다.

베네치아시가 두칼레 궁전 광고판에 야간 조명을 허용하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광고판이 두칼레 궁전의 전체 비율과 세부 모습을 방해하면서 두칼레 궁전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영국의 문화 보전 단체인 ‘위험에 처한 베니스 펀드’의 안나 소머즈 회장은 “베네치아 전체가 밤에 신비스러운 어둠에 파묻혀 있는데 테니스코트만한 두칼레 궁전 광고판만 밝게 빛나며 균형을 깨고 있다”고 비판했다.

가디언은 한발 더 나아가 유적지 광고판 설치가 이탈리아 현행법 위반일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탈리아 문화재 보전법은 건물의 외관이나 장식, 대중의 감상을 해치거나 피해를 주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글로벌 문화계에서 비판이 쇄도하자 조르지오 오르소니 베네치아 시장은 “이탈리아 다른 도시들에도 광고판이 수도 없이 많은데 유독 베네치아만 비난받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유적지 훼손도 없고 안전에도 문제가 없으며 로마로부터 지원금도 끊긴 상황에서 다른 선택의 수단이 없다”고 반박했다. 280만 유로에 달하는 두칼레 궁전과 ‘탄식의 다리’ 유지·보수 비용 절대액을 광고 수익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점도 덧붙였다.

김동욱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