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6형제바둑 신완식 대표 & 5형제
6형제가 모여 바둑판을 만든다. 대표에서부터 공장장, 판매담당, 심지어 해외 진출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서 최선을 다한다. 오직 하나의 꿈을 향해 힘을 모아온 지도 어느새 수십 년이다. 그래서 회사 이름도 (주)6형제바둑이다.6형제의 이름은 신완식·명식·병식·춘식·추식·우식이다. 이 중 제일 먼저 바둑판을 만드는 일에 뛰어든 것은 여섯 형제 중 맏이인 신완식 대표다. “형님을 시작으로 제가, 그리고 몇 년 후에 셋째, 그 담에는 막내, 넷째, 다섯째가 시간차를 두고 이 일에 합류했죠.”(신명식)
“완식 형님이 이 일을 시작하신 지가 47년째고, 명식 형님이 43년째,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합류한 다섯째인 제가 33년째가 되니까 여섯 명의 형제 경력을 다 합치면 (주)6형제바둑에 우리 형제의 수백 년 인생이 담겨 있는 셈이죠.”(신추식)
![[같은길 다른길] “가족의 땀 모여 하나의 바둑판이 되죠”](https://img.hankyung.com/photo/202102/AD.25527429.1.jpg)
중학교를 못 가는 것도 슬프건만 아버지는 어느 집 머슴살이로 보낼 생각까지 하고 계신 듯했다. 남의 집 머슴살이도 싫었지만 공부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분했다. 어머니에게 부탁해 서울 갈 차비만 얻어 집을 나왔다.
다행히 조남철 바둑 기사의 동서 되시는 분이 먼 친척이었다. 그 집에 의탁해 기원에서 카운터를 보거나 잔심부름을 하며, 그리고 바둑판을 수리하는 일을 도우며 살았다. “바둑판 위의 지워진 금들을 일일이 손톱으로 그어가며 금을 긋는 일들을 했죠.
그 후 바둑판을 만드는 곳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죠.”(신완식) 그때는 고향에서 바로 아래 동생인 명식 씨가 올라와 함께 공장을 다니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하나의 바둑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건조에서부터 완제품이 나오기까지 170번 정도의 손이 가요. 그러다 보니 바둑판 만드는 게 권투하는 것보다 힘들다는 이야기도 많이 합니다.”(신완식)
“오랫동안 대패질을 해서 우리 형제의 손가락들이 다 조금씩 굽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오래하신 완식 형님 손가락이 제일 많이 굽어 있죠.”(신우식)
![[같은길 다른길] “가족의 땀 모여 하나의 바둑판이 되죠”](https://img.hankyung.com/photo/202102/AD.25527430.1.jpg)
1975년 신 대표는 그간 일하던 공장에서 자립을 선언했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나서의 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바둑판을 만드는 곳이 얼마 없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공장 쪽에서는 자립해 봐야 몇 달 못 가 다시 기어들어올 것이라고 자신하더군요.”(신완식) 오기가 더 생겼다. 그 길로 전국 방방곡곡의 기원을 돌며 바둑판 수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국을 돌다 보니 바둑판 판매망도 구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감이 붙은 후에는 본격적으로 회사를 차렸고 일이 바빠지면서 형제 한 명, 한 명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간의 많은 사정을 어떻게 다 표현하겠어요.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강요 때문에 이 일을 시작한 사람이 없어요. 명절 때면 형님 댁에 모였다가 너무 바쁜 걸 보고 일손이라도 도와야겠다고 거들다가 아예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게 대부분이었죠.”(신병식)
그래도 회사의 얼굴은 6형제가 전부였다. “다들 물어보곤 합니다. 어떻게 6형제가 그렇게 사이좋게 일할 수 있느냐고. 그런데 비결은 다른 게 없어요. 그저 가족들 모두가, 특히 성씨가 다른 분들이 많이 양보하고 이해해 주니까 가능했던 거죠.(웃음)”(신완식)
각자의 안사람들 공이 크다는 얘기다. 그렇게 가족들이 함께 일한 지도 수십 년이 흘렀다. 그 시간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다. 회사를 차린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수금할 돈을 떼이기도 했고 예상치 않았던 화재 사고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어려움이 있을 때 가족은 더욱 똘똘 뭉쳤다. 누구 한 사람 할 것 없이 서로가 두 팔 걷어붙이며 재건의 의지를 다졌고, 한 사람의 아픔과 고통은 다른 가족들이 모두 기꺼이 나눠 짊어지곤 했다. 일에 몰두할 땐 너 나 할 것 없이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시간이 나면 반상을 두고 마주앉아 바둑을 두곤 했다.
“그래도 모두 그렇게 썩 훌륭하게 잘 두는 편은 아니에요.(웃음) 가끔 실력을 겨뤄보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완식 형님이 제일 잘 두시는 편이죠. 아마 3단 실력 정도는 될 걸요.”(신우식) “그래도 역시 프로 기사한테는 안 되던데요. 예전에 조남철 기사님과 바둑을 둬 본 적이 있어요. 자네 깔고 싶은 만큼 깔고 시작하자고 하셔서 25점인가를 깔고 시작했는데도 결국 졌으니까요.(웃음)”(신완식)
그렇게 울고 웃으며 6형제의 회사는 점점 더 단단하게 성장했고, 이제는 연 20억 원 매출 규모에 세계 각국으로 수출도 하는 명실 공히 국내외 최고의 바둑판 제작 회사로 자리를 잡았다. 고급 바둑판도 바둑판이려니와 중밀도섬유판(MDF) 재질의 접이식 바둑판을 개발해 바둑판의 대중적인 보급에도 힘썼다.
“더욱이 우리 바둑판은 세월이 흐르면서 바둑판의 두께가 점점 얇아지는 것에 착안해 다른 회사보다 두께를 2~3cm를 더해 오랜 세월이 흘러도 튼튼하게 사용할 수 있죠.”(신우식)
하지만 아직도 이들 형제들은 갈 길이 멀다고 자평한다. “바둑판 중에는 수령 400년, 800년의 나무로 만들어진 바둑판도 있어요. 그 바둑판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지만 결국은 자연이 만든 것과 같죠. 결국은 가족도 바둑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시간 속에서 끝없이 인내하고, 그리고 튼튼해지는 거죠.”(신추식)
“인공위성은 돈과 기술을 투자하면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좋은 바둑판은 아무리 돈과 기술을 퍼부어도 만들 수 없거든요. 일반적인 원목 하나를 건조하는 데도 10여 년의 자연 건조 시간이 필요해요. 결국 400년짜리 나무라고 하더라도 10년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비로소 바둑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결국 바둑판은 사람과 자연이 함께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신완식)
“대를 이어 세계 최고의 바둑판 만들 터”
(주)6형제바둑을 이끌어 나가는 이들 6형제 말고 다른 가족들도 있다. 바로 신완식 대표의 세 아들들이다. 아들들은 중국과 미국에서 유학을 하며 국제 감각도 익혔고 덕분에 외국어도 능숙하다. 6형제들은 이들 2세대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아직 시장이 활성화돼 있지 않은 중국 시장이나 해외 판매 루트를 뚫는데 귀중한 인적 자원이 되어 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요즘은 인터넷 바둑이 활성화돼 바둑판 시장도 그리 활성화된 편은 아니에요. 그래도 가능성은 크죠.”(신명식) “바둑이 중국에서 건너왔다고는 하지만 의외로 현재 중국에는 바둑판이 별로 없어요. 모두 종이나 합판에 줄을 그어서 바둑을 두죠. 잘만 공략하면 분명 가능성이 큰 시장이라고 봅니다. 다행히 아들들이 제 몫을 다해주고 있어서 앞으로가 더 기대됩니다.”(신완식)
혼자 시작한 일을 형제가, 또 2대째가 물려받게 되는 것은 모두 구심점이 튼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구심점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품고 있는 똑같은 꿈이다. “한국 바둑이 세계 최고잖아요. 한국의 솜씨와 기술로 세계 최고의 바둑판을 만들겠다는 꿈이 바로 우리의 꿈입니다!”(일동)
약력 : 신완식(60·앞줄 가운데) 대표와 명식(58)·병식(56)·춘식(52)·추식(49)·우식(46) 6형제 모두 수십 년 동안 투철한 장인 정신으로 바둑판을 만드는데 공을 들이고 있다. (주)6형제바둑은 전국 바둑판 시장의 70%를 점유하며 연매출 20여억 원을 올리고 있다. 바둑판 회사로는 드물게 남양주에 대형 생산 공장을 갖추고 있고 해외 진출을 활발히 모색하고 있다.
김성주 객원기자 helieta@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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