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이후 최대 호황 누리는 독일 경제의 비밀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독일 경제가 3.3%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치를 내놓았다. 유럽 전역이 재정 적자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극심한 경기 위축에 짓눌려 있는 사이 올 들어 독일 경제만 홀로 상승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8월 독일의 올해 2분기 경제성장률이 2.2%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자 영국의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독일 경제의 상승세를 가리켜 ‘터보엔진을 달았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당시 2.2%라는 분기 성장률이 의미하는 바는 ‘독일 통일 이후 20년 만의 최고 기록’이라는 말에 잘 압축돼 있다.

독일 경제의 이 같은 호조는 같은 기간 유로존 전체 성장률 1%의 두 배가 넘는 것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2분기 성장률은 0.2% 상승에 그쳤고 유럽 경제 위기의 진원지였던 그리스는 1.5%나 후퇴했다. 프랑스의 0.6% 성장을 두고도 경제 분석가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치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독일 경제의 견고한 성장세는 더욱 두드러진다.
<YONHAP PHOTO-1623> FILE - In this July 16, 2009 file photo an employee of the Daimler AG works on a car of the Mercedes-Benz E-class on the production line in the Mercedes-Benz site in Sindelfingen, Germany. Car maker Daimler AG is reporting on Tuesday, July 27, 2010 second-quarter earnings of euro 1.3 billion (nearly US dollar 1.7 billion) and has raised its full-year outlook substantially. (AP Photo/Thomas Kienzle, File)/2010-07-27 19:25:33/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FILE - In this July 16, 2009 file photo an employee of the Daimler AG works on a car of the Mercedes-Benz E-class on the production line in the Mercedes-Benz site in Sindelfingen, Germany. Car maker Daimler AG is reporting on Tuesday, July 27, 2010 second-quarter earnings of euro 1.3 billion (nearly US dollar 1.7 billion) and has raised its full-year outlook substantially. (AP Photo/Thomas Kienzle, File)/2010-07-27 19:25:33/ <저작권자 ⓒ 1980-201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탄탄한 제조업…금융 중시 영국과 정반대

그러나 이 당시만 해도 독일 경제가 이와 같은 성장 모멘텀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리라고 보는 전문가들은 소수였다. 예를 들어 ING파이낸셜 마켓의 카스텐 브르제스키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독일 경제의 상승이 눈에 띄는 것은 사실이지만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성장률은 일회성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건설업 비중이 높은 독일 경제의 특성상 겨울이 지나고 2분기에 접어들면서 성장률이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는 계절 요인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졌다. 따라서 2분기 성장률 추이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한 전문가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IMF가 올해 3.3%라는 성장 전망치를 내놓으면서 분위기는 또다시 반전하고 있다. 독일 정부도 잇따라 성장 전망치를 수정 발표했다.

거시 경제 전망치뿐만 아니라 기업인들이 실제로 느끼는 기업신뢰지수도 상당히 높게 나타났다. 독일 뮌헨에 있는 경제연구소 IFO가 조사해 발표한 9월 신뢰지수는 106.8로 집계돼 2007년 이후 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게다가 이 수치는 지난 9월에 비해 하락 반전할 것이라는 기존 전망을 뒤집고 오히려 0.1포인트 상승한 것이어서 시장의 반응은 더욱 뜨거웠다.

자국 경제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도 역시 덩달아 증가하고 있다. 시장조사 기관인 GfK(Growth from Knowledge)가 독일 내 2000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10월 소비자신뢰지수는 지난 9월의 4.3에서 0.6이나 상승한 4.9로 나타났다. 당장 가계 수입이 늘고 실업률이 떨어지다 보니 경제 주체들이 경기 추가 상승에 대해 낙관적 전망을 공유하고 있다는 얘기다.

실업률 하락은 이런 낙관적 전망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힌다. 최근 기업체 인사 담당자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87%가 향후 1년 동안 고용을 늘릴 계획이라고 밝힌 점만 봐도 그렇다.

최근에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직접 나서 ‘독일의 실업자 수가 내년에 300만 명 또는 그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독일의 실업자 수 300만 명은 9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독일 산업연맹(BDI)의 한스 피터 카이텔 회장은 “기적이나 다름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독일 경제가 이렇게 호황을 누리다 보니 독일 수출 산업과 연관성이 높은 벨기에와 오스트리아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의 대표적 수출 상품인 자동차를 만들 때 차축은 벨기에에서 대부분 들여온다. 중국 다음 가는 수출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독일의 수출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는 유럽 경제가 한둘이 아니라는 얘기다.

한마디로 독일 경제가 유로존을 이끌고 있는 형국이다. 메르켈 총리는 최근 독일경제인연합회(BDI) 콘퍼런스에서 아예 한걸음 더 나아가 “독일이 세계경제를 안정시키고 있다”고 자신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독일 경제의 성장을 이끄는 요인으로는 무엇보다 강력한 제조업 기반을 중심으로 수출 주도형 성장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꼽힌다. 유럽 경제의 약세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도·브라질 등 신흥 시장이 구매력을 유지한 덕분에 독일 기업들의 수출 성장세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독일의 올 2분기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4.7% 증가했고 지난 7월에도 지난해에 비해 25.6% 늘었다. 제조업을 등한히 하고 1980년대 이후 금융 산업으로 국가 경제의 중심축을 옮겨 버린 영국이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벼랑 끝에 몰려 있는 것과 비교하면 제조업 기반을 유지해 온 독일 경제의 저력을 실감할 수 있다. 영국 경제도 최근 제조업에서 르네상스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정부의 구두선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욱이 독일 제품을 선호하는 구매층이 중국의 중산층과 신흥 부유층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를 들어 지난 7월 메르세데스 벤츠는 중국 시장에서 승용차만 1만600대를 팔았다. 지난해 같은 기간 판매량이 4800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1년 만에 2배가 훨씬 넘는 판매량을 기록한 것이다.

인도 시장에서도 중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2배 이상의 매출 신장을 기록했다. 중·장기적으로 볼 때 고부가가치 제품의 흡수 여력이 충분한 이들 신흥 시장과 동반 성장 시나리오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독일 경제의 호황을 놓고 좀더 근본적인 원인에 주목하는 학자들은 이른바 ‘라인 자본주의’의 유산에 관심을 두기도 한다.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와 달리 은행·근로자·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들과의 네트워크를 더욱 중시하는 독일식 자본주의의 장점이 금융 위기 국면을 맞아 상대적으로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식시장 중심으로 자금을 조달하기보다 은행 차입을 중심으로 자본을 조달하고 연구·개발에 장기 투자하며 노사의 사회적 협력 체계가 공고하다는 것도 독일식 자본주의의 또 다른 특징이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은 미국식 세계화의 진전과 더불어 한때 경제 발전의 장애물로 취급당해 온 요인들이기도 하다.

독일 자본주의 시스템에 독특하게 내장돼 있는 단축 노동 프로그램 같은 것들도 경제 위기 시대에 빛을 발하는 요소다. 이 제도는 기업들이 경기 침체 때 근로자를 해고하는 대신 근무시간을 줄이면 정부가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제도는 일감이 줄어든다고 해서 근로자들을 바로 내몰지 않고 고용 수준을 유지함으로써 경기 변동에 신축성 있게 대처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실업률 증가를 사전에 예방하고 근로자들의 소비 수준을 유지함으로써 국내 소비를 뒷받침하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독일식 자본주주의’의 저력 평가도

이러한 ‘일자리 나누기식’ 고용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분위기도 중요하다. 고용 시장 내의 일자리 이동이 상품 시장 이상으로 자유로운 미국식 고용 시스템 아래에서는 이런 고용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반면 독일 노동자들은 근면과 성실이 몸에 배어 있고 기술자에 대한 사회적 존경의 뿌리 또한 깊다. 직장을 선택할 때 급여 조건도 중요하지만 자기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전통과 경영자에 대한 충성심도 중요한 고려 요소다.

물론 최근 실업률을 낮게 유지하고 있는 이면에는 저임금 근로자층의 확대라는 어두운 면도 깔려 있다. 시간당 9유로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을 받는 독일 근로자는 전체의 20%에 이른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평균을 웃도는 수치다.

한편 지금과 같은 수출 의존형 경제는 언젠가 독일 경제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는 관측도 있다. 더욱이 신흥 성장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이들 국가들이 경기 조정 국면에 접어들었을 때 독일 경제를 위협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저런 비관론과 신중론에도 불구하고 독일 경제의 ‘나 홀로 약진’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독일 경제의 상승 행진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하다.


성기영 영국 통신원(워릭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
sung.ki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