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나는 러시아 경제
지난 9월 9일 이명박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다. 이 대통령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와 잇따라 회담을 열고 에너지·자원, 극동 시베리아 개발 등 경제협력 방안을 집중 협의하고 동북아 평화 유지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9월 7일에는 푸틴 총리가 기아차를 생산하다가 글로벌 금융 위기로 가동을 중단한 이즈아프토 자동차 공장을 방문하고 기아차 제품 재생산을 위해 기아차 관계자를 면담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카자흐스탄에서 열린 주거박람회장의 한국 기업 부스에 들렀다. 푸틴 총리는 9월 21일 현대자동차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준공식에도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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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촉발된 세계 금융 위기는 그나마 2007년 무렵부터 조금씩 살아나고 있던 국내 기업의 러시아에 대한 관심에 찬물을 끼얹었다. 세계 금융 위기에 따라 원자재 가격이 급락하면서 다른 신흥 개발국보다 러시아가 치명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증시 지표인 RTS지수는 2009년 1월 29일 530.7을 기록, 고점(2008년 5월 19일 2487.92) 대비 5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다. 2000년 이후 8년 연속 평균 7%대의 성장을 기록하던 러시아의 경제성장률은 2009년 마이너스 7.9%를 기록했다. 러시아에 대한 해외 직접투자 규모도 2008년에 비해 4분의 1 규모로 축소됐다.
자원 의존형 경제구조, 과열된 부동산 시장, 공공부문의 비효율, 러시아 기업과 은행의 과도한 해외 차입금 때문에 러시아는 세계 3위의 외화보유액에도 불구하고 브릭스(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내에서도 유동성 위기에 취약한 국가로 분류돼 왔다. 급기야 러시아를 브릭스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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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여파로 국내 기업의 러시아에 대한 관심도 급속히 냉각됐다. 2009년 러시아에 대한 수출액은 전년 대비 마이너스 57.0%, 러시아로부터의 수입액은 마이너스 30.6%로 교역 규모도 급감했다.
그러나 2009년 2분기부터 러시아 실물경제와 금융 부문의 지표들이 호전되기 시작해 2010년 상반기에는 4.3%의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인플레이션과 실업률도 하락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국제 신용 평가 회사들은 앞다퉈 러시아의 신용 등급 전망을 ‘부정적’에서 ‘안정적’으로 상향 조정했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위기는 극복됐다”는 자신에 찬 얘기까지 흘러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이런 예상치 못한 빠른 경기 회복에는 국제 석유 가격의 상승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브라질의 사례에 비춰 보더라도 러시아의 드라마틱한 경기 회복은 국제 석유 가격의 상승이라는 단일 요인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러시아 정부는 1998년 외화 부족으로 모라토리엄(Moratorium:지급유예)을 선언한 아픈 경험이 있어 자원 수출을 통해 취득한 막대한 외화 수익의 일정 부분을 석유안정화기금으로 축적했다. 기금은 지난 2008년 8월 기준으로 약 580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이를 바탕으로 세계 금융 위기로 촉발된 유동성 위기에 기민하게 대처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루블화 안정을 위해 금융 위기 즉시 1000억 달러 이상의 루블화를 매입하는 등 외환시장에 적극 개입하고 인플레이션 조정을 위해 11%에 달하던 기준금리를 7.75%까지 점진적으로 인하했다. 러시아 정부는 경기 부양 및 금융회사의 유동성 지원을 위해 2009년 2조7000억 루블(약 810억 달러)을 지출했다.
러시아 정부의 위기 대응 전략의 핵심은 국내 경제 질서에 영향을 미치는 적극적인 정책(예컨대 금융회사의 지급준비율 상향을 포함한 구조조정 정책)을 펴기보다 민영화 및 공기업의 구조조정을 포함한 민간에 대한 간접적인 지원을 확대해 외국인 투자 유치를 촉진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러시아는 2009년 6월 브릭스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등 글로벌 거버넌스 개편을 주도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을 적극 모색하면서 동시베리아 및 극동 개발, 에너지 및 관련 사회 기반 시설 개발, 부품 산업 현대화를 위한 공기업 재편 및 투자 유치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올 상반기 경제성장률 4.3%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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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금융 위기 이후 법인세율 인하, 재산세 면세 한도 확대, 소득세 감면 및 공제 범위 확대, 부가가치세 환급 절차 간소화 등의 세제 혜택을 확대했고 2008년 도입된 자원 개발 등 전략 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 규제 완화를 검토 중이다. 지금까지 줄곧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에 소극적인 입장을 고수해 온 러시아로서는 주목할 만한 변화다.
세계적 금융 위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고 있는 러시아가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는 산업구조의 다각화와 동시베리아·극동 개발이다. 러시아는 유럽 일변도의 경제협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제협력 파트너를 모색하고 있으며, 일단 그 대상은 브릭스의 나머지 3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동시베리아·극동 개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중국에 대한 러시아의 태도는 다소 모호하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국경분쟁, 역사적 갈등, 중국 이민자의 대규모 유입을 염려해 중국과의 에너지 자원 개발 협력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광활한 영토와 막대한 부존자원은 이제 새로운 투자자를 향해 열리기 시작하고 있다. 세계는 다시 러시아를 주목하고 있으며 2008년 국제통화기금(IMF)이 예상한 것처럼 2013년 러시아가 프랑스와 영국을 제치고 세계 제5대 경제 강국으로 올라설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게 됐다.
1998년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러시아를 떠났던 기업들은 아직까지도 러시아 시장에 재진입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IMF 사태와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이 맞물리면서 우리나라 정부가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에서 손을 뗀 후 아직까지 러시아의 자원 개발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상황은 우리나라 기업에 어떤 기회와 도전을 제공할 수 있을까. 9월에 한국과 러시아의 정상이 보인 행보에서 해답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러시아는 부품 산업과 제조업의 부흥을 도와줄 새로운 파트너가 필요하고 우리나라는 자원 및 원자재 수입의 다변화가 필요하다. 러시아는 노후화된 사회 기반 시설과 제조 시설을 혁신해 줄 투자자가 필요하며 우리나라는 차세대 산업 발전의 계기가 되어 줄 원천 기술이 필요하다.
이제 이머징 마켓은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이 최고의 장점인 시장이라는 고정된 관념에서 탈피해야 한다. 러시아야말로 21세기 무한 경쟁의 글로벌 시대에 우리나라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제공해 줄 소중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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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졸업.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 정치학 박사. 사법연수원 제34기 수료. 법무법인 지평지성 변호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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