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의 아버지] ‘긍정의 힘’을 물려주시다
가을을 곁에 두고 있으니 늘 읽던 책 말고 선뜻 시집에 손이 간다. 윤석산 시인의 시집 ‘밥 나이 잠 나이’를 펼쳐드니 모처럼 마음 한가득 촉촉해진다. 시인이 시집 대신 신문을 집어 들며 아버지 생각에 잠기는 데서 잠시 목이 잠긴다.

“신문은 늘 아버지의 차지였다 / 우리가 잠들어 있는 사이 누군가 / 대문의 틈새에 비집고 놓고 간 / 세상의 일들. / 실상 아버지 말고는 누구의 관심거리도 되지 못했다. / 아버지는 늘 저 많은 세상의 일들 속에 / 서 계시는구나, / 우리는 다만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 윤석산 ‘신문을 집으며’ 중에서


아, 정말 그랬다. 시처럼 어린 시절, 아버지를 대강 ‘가늠’하는 것에 그쳤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버지 생각에 마음이 울컥해졌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마음처럼 살갑거나 다정한 분은 아니었다. 경상도 특유의 엄격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아버지가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손재주가 좋으셨던 아버지는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하셔서 작은 가구 공장을 운영하셨다. 누군가의 표현대로라면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촌놈들의 서울 정복기’라고 하던데, 우리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유전인자 가운데 내가 물려받은 최고를 꼽으라면 ‘긍정의 힘’과 ‘정’을 들 수 있다. 큰딸에 거는 기대가 유독 많으셨던 아버지는 늘 나에게 힘들고 어려워도 다시 도전하게 만드는 에너지를 안겨주셨다. 아버지는 늘 ‘너는 잘 될 사람이다’라고 세뇌 교육하듯 내 머릿속에 긍정의 에너지를 심어주셨다.

또 아버지는 유난히 ‘밥정’이 넘치는 분이셨다. 어린 시절 내내 가난하고 굶주렸던 기억 탓인지 아버지는 친척이나 친구, 이웃 누구에게라도 밥과 술을 그득하게 퍼주셨다. 거래처에서 수금하는 날이면 아버지는 사람들과 어울려 거나하게 술을 걸치시곤 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그 시절, 아버지는 술김에 수박 한 통을 들고 오셨는데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 깨지고 또 쪼개져서 결국 한 조각의 수박만 남게 된 것이다.

새벽녘에 자고 있는 나를 깨우는 아버지의 목소리,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보다 더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건 수박 물로 벌겋게 물든 아버지의 흰색 셔츠였다. 눈을 반쯤 감은 채 수박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자 아버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사실 이 장면은 서른이 넘어서야 흑백의 활동사진처럼 내 눈앞에 펼쳐져 잠시 나를 당황스럽게 하기도 했었다. 아버지의 붉게 물든 셔츠와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에 눈시울이 뜨거워져 한동안은 수박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졌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그냥 이렇게 열심히 살아 식구들 편안히 살면 다 내 마음을 알아주려니…’ 하셨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는 사실 그 깊은 속을 알 길도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윤석산 시인의 시처럼 우리 마음대로 ‘다만 그렇게만 생각’하면서 가늠하는 것에 그칠 뿐.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내 아이들만은 잘 먹이고 잘 가르치는 부끄럽지 않은 아비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오셨을 아버지는 마흔아홉, 한겨울에 저세상으로 가셨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나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던 탓인지, 어린 시절에는 없었던 아버지에 대한 연민은 사회인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 자꾸 새록새록 커진다.

가을이 되면 잊힌 사람, 떠난 사람이 새삼 그리워진다. 아침저녁 바람 한 끝에 소슬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하루하루 고단한 삶 앞이라 더욱 그럴까. 언제까지나 내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실 것 같았던 젊은 아버지, 그 아버지의 그늘 아래 철없이 뛰놀았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진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마음의 편지라도 드려볼까. 가을은 그렇게 조금씩 깊어간다.


전미옥 CMI연구소 대표

약력 :
대우중공업 사보 기자를 거쳐 (사)한국사보협회 부회장, 사랑의열매 홍보위원으로 있으며 자기 계발과 커뮤니케이션 강의를 하는 한편 CMI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