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기울기에 투자하라(하)
주가 수준을 판단하는 지표로 주가수익률(PER)이 자주 인용된다. 이제 웬만한 개인 투자자들에게도 익숙한 지표다. PER(Price to Earnings Ratio)는 기업의 주가가 주당순이익의 몇 배에 거래되는지 그 배수(倍數)를 나타낸다. 그러나 PER에는 실로 다양한 의미가 내포돼 있기 때문에 이를 꼼꼼히 뜯어보면 매우 유용한 투자 정보를 얻을 수 있다.먼저 PER는 주가가 기업의 이익을 몇 년 치 가불했는지 그 가불 연수를 나타낸다. PER가 10배인 주식은 투자 원금(주가)을 회수하려면 1주가 벌어들이는 주당순이익(EPS)을 기준으로 10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다. 즉 현재의 주가는 10년 치의 이익을 미리 가불해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모 자산운용사의 운용본부장을 맡고 있던 2000년 1월의 일이다. 당시 주식시장은 정부의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 사업에 힘입어 정보통신 기업과 코스닥의 인터넷 기업들의 군웅할거 시대였다. 소위 ‘닷컴’ 열풍이 증시를 무섭게 달구고 있었다.
더욱이 대장주의 선봉에 선 주식은 통신용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인 ‘새롬기술’과 ‘다음’이었다. 자본금 수십억 원으로 출발한 두 회사의 주가는 2000년 2월께 새롬기술은 300만 원, 다음은 400만 원을 돌파했다. 당시의 이익을 기준으로 PER가 3000배를 넘고 있었다.
필자는 당시 모 경제신문의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두 주식의 비이성적인 주가 수준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3000년을 인내하고 기다릴 자신이 있으면 투자하라. 1년도 채 기다리지 못하는 한국의 개인 투자자들의 습성으로 볼 때 3000년짜리 주식에 투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 후 몇 달이 안 돼 투기 세력이 이탈하면서 새롬기술은 100분의 1토막이 됐고 다음도 20분의 1 수준으로 폭락하면서 시장은 숱한 개미 투자자들의 무덤이 되고 말았다. 평생에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탐욕’과 ‘광기’가 빚어낸 무서운 드라마였다.
![[최남철의 투자 X파일] 주가는 이익과 인기에 비례하는 법이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102/AD.25527571.1.jpg)
필자는 강연회에서 PER를 설명할 때 풍선 불기에 비유하곤 한다. 어릴 적 문구점에서 고무풍선을 사서 불고 다닌 기억이 있는데, 바람을 넣지 않은 납작한 풍선은 PER가 1배인 주식에 비유할 수 있다.
여기에 ‘미래’와 ‘꿈’이라는 바람이 주입되면서 풍선이 부풀어 오르게 된다.
향후 몇 년 안에 새로운 기술이 도입돼 신제품이 출시되면 이익이 급신장한다거나 대규모 수주가 예상돼 매출이 늘어나고 개발 특허만 취득하면 세계시장을 석권한다는 등의 장밋빛 미래가 마치 금세 실현될 것처럼 주가를 끌어올린다. 이런 부류의 주식들은 대부분 신기술·신제품·세계특허·유전·금광 등 현란한 유혹을 앞세워 ‘한탕’에 목마른 투자자들의 탐욕을 자극한다.
마치 10년 전 새롬기술처럼 PER가 수천 배에 달할 때까지 돌아가면서 풍선을 열심히 불어 댄다. 이때 풍선의 지름이 곧 PER라고 보면 된다. 마침내 풍선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탐욕의 바람이 주입되면 순식간에 꿈이 물거품이 되는 폭락이 연출되는 것이다.
적당하게 부풀어 올라 각종 행사장을 빛내는 형형색색의 풍선은 보기에도 아름답다. 기업의 주가도 실적과 가치에 어울리게 형성돼야 보기 좋다. 주식 투자가 본질상 미래의 가치를 가불해 ‘꿈을 사고파는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상식과 합리적인 수준을 벗어나면 화를 부르게 된다. 그래서 탐욕을 절제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필자는 몇 년 전 상장사 IR협의회가 주관한 조찬 미팅에 강사로 초빙돼 기업설명회(IR) 담당 임원들에게 PER에 모든 진실이 들어 있다고 강연한 바 있다. 내가 주장하는 ‘PER 이론’은 매우 간단하다.
‘P(주가 또는 시가총액)=E(이익)×R(시장 인기).’ 즉 기업의 주가(시가총액)를 구성하는 두 바퀴는 바로 기업의 이익과 시장에서 투자자들이 부여해 주는 인기다.
우리가 흔히 고PER주로 분류하는 주식들은 이익의 규모에 비해 주가가 높게 형성되는 경향이 있다. 미래의 성장성이 큰 성장주와 첨단산업에 속한 주식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반면 기업의 실적이나 가치에 비해 주가 수준이 낮은 주식을 저PER주라고 부른다. 성장성이 결여된 성숙산업·사양산업·전통산업에서 흔히 목격되곤 한다.
주가 수준을 결정하는 또 다른 요인은 바로 시장에서의 인기다. 같은 성장산업 또는 전통산업군 내에서도 투자자들에게 회사의 내용을 제대로 알리고 홍보하느냐에 따라 주가 수준에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20여 년간의 투자 경험을 통해 시장에서 투자자들에게 인기가 높은 기업군들의 일관된 특성을 알게 됐다. 즉 R가 높은 기업은 경영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바탕으로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는 기업인 경우가 많았다.
또 주주의 이익과 주주 가치 신장에 확고한 철학을 가진 기업들의 인기가 높았다. 경영 성과를 주주들과 나누고 주주를 배려하는 기업들이 투자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무분별한 증자를 통해 주주 가치를 떨어뜨리고 배당에서도 인색한 기업들이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경영자의 자질도 꼭 고려해야
같은 상품이라고 하더라도 포장이 예쁘고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아야 잘 팔리는 원리와 같이 동일한 기업 내용을 가지고도 홍보와 IR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투자자들의 인기는 달라질 수 있다.
요즘 많은 기업들이 IR 전문가를 외부에서 영입하고 IR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주(투자자)의 쪽에서 볼 때 주주 가치(Shareholders’ Value)는 곧 시가총액이기 때문에 생산 현장에서 벌어들이는 이익 못지않게 주가 수준이 중요하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서 이익을 낸들 시장에서 외면 받아 주가가 낮게 유지된다면 주주 가치는 그만큼 훼손된다.
이제 기업들도 이익에 대한 인식을 과감히 바꿔야 한다. 수백 명을 고용해 100억 원의 이익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능력 있는 IR 담당자 1명이 회사의 이미지와 신뢰를 높여 시가총액을 몇 천억 원 이상 끌어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투자자들은 같은 조건의 기업이라면 IR를 제대로 하는 회사에 투자해야 한다. 외국의 기업들이 경영자 평가의 최우선 기준으로 임기 내에 주가, 곧 시가총액을 얼마나 끌어올렸는지를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업의 주가 혹은 시가총액이야말로 기업의 영업·재무·경영활동을 종합해 평가하는 총화(總和)임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시장의 인기는 일시적인 속임수나 거짓으로 유지될 수 없다. 기업 내부를 투명하고 예측 가능하게 알리고 끊임없이 투자자들과 대화하면서 신뢰를 구축해 나가야 인기를 얻을 수 있다.
나아가 경영의 효율성을 높여 영업·재무활동이 여과 없이 주가에 반영될 수 있게끔 효율적인 경영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와 함께 주주를 가족처럼 동반자로 소중히 여기고 애정과 나눔의 철학을 가져야 지속적인 신뢰와 인기를 유지할 수 있다.
기업의 가치를 논할 때 흔히 ‘수익 가치’나 ‘자산 가치’를 따지는데, 필자는 여기에 경영자의 자질이나 주주 배려의 정신을 추가하고 싶다. 필자는 이것을 ‘경영자 가치’라고 부른다. 필자는 펀드매니저 시절 기업의 양적 수치 못지않게 숨겨진 경영자의 가치를 찾기 위해 애써 왔다. 그러나 경영자를 파악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최남철 증권 칼럼니스트
약력 : ‘꿈의 기울기에 투자하라’의 저자. 1988년 국민투자신탁 펀드매니저를 시작으로 푸르덴셜자산운용 등을 거쳐 현재 새로다시투자클리닉(cafe.naver.com/serodasi)을 운영하고 있다
serodas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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