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브랜드

언제부턴가 아파트가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단서가 돼 버렸다. 강남 ○○아파트에 산다고 말할 때와 강북의 △△아파트에 산다고 밝힐 때 상대방의 태도가 달라진다.

사는 아파트로 차별 대우를 받는 시대다. 전체 주택 가운데 아파트 비중은 이미 절반을 넘었다. 2005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아파트는 전체 주택의 52.7%에 달한다. 이에 따라 브랜드가 중요해졌다.

아파트 이름을 대면 그 사람의 소득수준과 지위 등을 미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값이 상상을 초월하는 강남 도곡동의 타워팰리스, 삼성동의 아이파크 등은 이미 ‘부(富)의 상징’이 됐다. 이와 관련된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다. 아파트 브랜드와 관련된 얘기다.
[김문권의 부동산 나침반] 아파트 이름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
강남에 사는 고등학생을 둔 두 부모가 자녀를 미국에 유학 보내려고 미국의 대학에 SAT(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 점수와 입학원서를 함께 냈다. 두 가정 모두 중산층이 넘는 규모의 자산을 가졌다.

결과는 A군은 떨어지고 B군은 장학금을 받고 합격했다. SAT 성적이 우수하고 에세이에도 별 차이가 없어 둘 다 무난히 합격하리라 여겼는데 의외의 결과였다. 그런데 합격과 불합격의 기준이 특별났다.

A군은 원서의 주소란에 롯데건설이 지은 대치동 롯데캐슬에 산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게 불찰이었다. 대학 측은 왕족이나 귀족들의 저택인 ‘캐슬(castle)’에 거주하는 학생은 받을 수 없다며 A군을 불합격시켰다. 반면 현대산업개발의 삼성동 아이파크에 사는 B군은 ‘공원(park)’에 사는 가난한 학생인데도 성적이 우수하다는 이유로 장학생으로 뽑혔다.

한국에서는 최고가 아파트인 아이파크이지만 미국 대학은 공원에 사는 홈리스 수준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에서는 아파트 명칭에 불과한 캐슬과 파크가 미국 대학의 입학 기준이 됐다는 씁쓸한 이야기다. 물론 실화는 아니다.

사회·경제적 지위의 척도로 부상

이처럼 아파트 브랜드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사실 아파트에 브랜드가 붙은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1998년 외환위기 이전에는 그저 건설사와 지역 이름이 붙었을 뿐이다. ‘압구정현대’, ‘개포주공’ 등. 단순하지만 아파트의 위치까지 알 수 있어 편했다.

그 후 삼성쉐르빌(삼성중공업), 대림아크로빌(대림산업) 등 영어와 외래어가 혼용된 과도기를 거친 뒤 자이(GS건설), 래미안(삼성건설), e편안세상(대림산업), 푸르지오(대우건설) 등의 브랜드가 자리를 잡았다.

소비자들은 이제 브랜드로 아파트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브랜드 자체가 상품의 질을 담보하는데다 입주자의 사회적 위치를 나타내 주는 ‘문패’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이빌·렉슬·위브·센트레빌·에코메트로·스타클래스 등 알 듯 모를 듯한 브랜드가 넘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서브(sub) 브랜드까지 등장해 소비자를 더 헷갈리게 한다. 래미안퍼스티지, 래미안하이어스(삼성건설), 갤러리아포레(한화건설) 등은 사전을 찾아봐도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집을 찾지 못하도록 아파트 이름을 어렵게 지었다는 얘기가 나돌 만하다. 건설사 관계자들에 따르면 외래어를 쓰면 왠지 고급스럽게 보여 우리말 쓰기를 꺼리는 풍토가 조성됐다고 한다.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1446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하루 쉬는 법정 공휴일에서 국경일로 격이 낮아졌지만 한글은 우리글이다. 한글날을 맞아 ‘아파트 이름을 지을 때 외래어를 금지하는 법이라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김문권 편집위원 m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