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강사 겸 작가 이예숙

그녀를 만나면 누구나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된다. 더 치열하게, 더 열심히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한계를 뛰어넘고 싶어 하는 새로운 자신을 만나게 된다.봉제공장 ‘공순이’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일본어 강사가 된 이예숙 씨 이야기다.학교를 가려면 왕복 16km를 걸어야만 하는 충청도 산골,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그곳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하곤 했다. 하지만 자전거를 살 형편이 못돼 하루에도 몇 시간씩 걸어 다녀야만 했던 산골 소녀가 있었다. 흔히 말하는 ‘불우한 가정환경’은 그 소녀에게 평범한 고등학교 입학도 허락하지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전에 있는 봉제공장으로 일하러 가게 됐어요. 다행히 공장에 부속학교가 있어서 공부는 계속할 수 있었죠.” 낮에는 공장 일을 하며 밤에는 공부를 했다. 일이 숙련된 후에도 남들처럼 더 나은 대우나 월급을 좇아 공장을 옮겨 다니지도 않았다.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의리가 있어서도, 그 공장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말이 ‘공순이’라는 말이었거든요. 그래서 비록 지금은 내가 공장에 다니지만 절대 공순이로 끝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어요.”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밖에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공장 부속학교에 다니다 보니 공장을 그만두면 학교도 그만둬야 했다.그래서 학교를 졸업하고, 비록 전문대학교지만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그녀는 줄곧 그 공장에서만 일했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갔지만 그녀의 인생이 한순간에 확 달라지지는 않았다.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또다시 온갖 아르바이트를 섭렵할 수밖에 없었고 방학 때면 다시 공장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막상 졸업하긴 했는데, 학교 성적이 썩 좋은 편이 아니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열심히 하면 일한 만큼 돈은 벌 수 있겠다 싶어 화장품 외판 사원으로 나섰죠.”일본어를 공부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도 바로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꿈 때문이었다. “화장품을 팔기 위해 우연히 방문한 일본어 학원에서 원장 선생님과 친분을 쌓게 되었어요. 그 선생님과 이야기하던 중 일본어 통역사가 되면 어떨까 생각했죠.” 얼마 후 그 원장 선생님은 그녀에게 학원 경리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월급은 단돈 15만 원. 꽤 괜찮았던 외판 사원 수입과 비교할 수 없게 적은 돈이었다.“하지만 경리로 일하면 일본어는 공짜로 배우게 해 주겠다는 거예요. 지금 당장 월급은 적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망설일 게 없었죠.” 그때부터 학원 경리로 일하며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시작된 일과 공부의 연속이었다. 한창 멋 부리고 예뻐 보이고 싶을 나이였지만 오직 일, 그리고 일본어 공부에만 매달렸다. 꾸준히 독하게 공부한 끝에 얼마 후에는 일본어 능력 시험에도 합격했고 통역 학원에도 다니며 일본어 통역사로의 꿈을 키워나갔다.그러던 어느 날 작은 우연이 또다시 그녀의 인생 항로를 결정지었다. “어느 날인가 일본어 선생님 한 분이 갑자기 아파서 결강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그 시간을 때우게 됐죠.” 난생처음 배우는 입장이 아닌 가르치는 입장이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첫 수업은 예상외로 학생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반응이 좋으니까 학원 측이 새벽 6시 수업이라도 맡아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하더군요. 얼른 하겠다고 했죠.” 수강생이 한두 명밖에 없는 시간대였지만 신이 나서 준비하고 열성적으로 가르쳤다. 6시 강의에 맞추기 위해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준비해야 했지만, 몇 없는 수강생조차 결석하는 바람에 빈 강의실에 홀로 있었던 때도 있었지만 그녀는 마냥 행복했다.“공순이였던 제가, 언제나 ‘미스 리’라고 불렸던 제가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행복했겠어요.” 그래서 남들보다 수업 준비에도 한결 더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가르친 것이 틀리면 자신이 다시 공부해 다시 알려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수강생들을 위해 직접 김밥을 말고 커피를 타서 가져다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처럼 수업에 공을 들이다 보니 그녀의 강의는 조금씩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새벽 시간대의 강의에서 황금 시간대의 강의로, 더 큰 학원으로 옮겨가며 실력 있는 일본어 강사로 자리 잡았다.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점점 더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이게 최선일까,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게 맞을까, 고민했죠. 그리고 결론 내렸어요. 아직은 부족하다. 더 공부해야겠다고.” 결국 학원 강사로 자리도 잡았고 남부럽지 않은 월급도 받게 되었지만 그녀는 더 나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일본 유학을 결정했다.“제 수강생들에게 가장 많이 해 주는 이야기가 바로 두 가지 용기에 대한 거예요. 버릴 줄 아는 용기, 부딪칠 줄 아는 용기. 그 두 가지 용기가 바로 오늘의 저를 만든 것이죠.” 물론 일본 유학도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일본어 강사를 했지만 막상 일본 현지에서는 회화가 통하지 않아 답답하기 일쑤였다.실생활에서 쓰이는 일본어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접하고 배우기 위해, 또 생활비를 벌기 위해 또다시 아르바이트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또다시 주경야독을 반복하며 대학교에서 일문학을 공부하고 학사에 이어 석사과정까지 모두 마칠 수 있었다.십여 년 동안의 일본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그녀는 줄곧 YBM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녀를 두고 주위에서는 ‘재등록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제 수업을 한 번이라도 들은 수강생들은 저한테서 떠나려고 하지 않아요.(웃음) 90% 이상이 재등록할 정도여서 ‘재등록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었죠.”또 하나, 그녀의 수업을 듣는 이들은 절대 결석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수업을 놓치는 것을 너무나 아깝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녀의 수업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20년간 그녀 자신이 독하게, 치열하게, 어렵게 익힌 일본어 노하우를 그녀 특유의 달변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특히 제가 학생들에게 가장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추리하는 방법이에요. 일본어만이 아니에요. 다른 외국어를 배울 때에도 대부분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힘들어하고 주저앉고 말죠. 그럴 때 앞뒤 상황을 관찰하고 그 뜻을 추리해 보면 아는 단어만으로도 얼마든지 그 상황, 그 대화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제아무리 초보라고 하더라도 그녀는 수업 시간 내내 한국말을 쓰지 못하게 한다. 오직 일본어에 집중하고, 상황에 집중하고 추리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수업 중간 학생들의 집중력이 떨어질라치면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학생들에게 학습 의욕을 고취시킨다.“나 같은 사람도 할 수 있었다는 걸 알려주는 거죠. 열심히만 하면 당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에요.” 얼마 전에는 이런 그녀만의 일본어 공부 노하우를 ‘일본어 천재가 된 홍대리’라는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해 내놓기도 했다. 이제는 세상이 알아주는 일본어 실력을 갖추게 된 그녀지만, 그녀는 아직도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이젠 영어도 마스터해야죠.(웃음) 학생들이 그러더라고요. ‘선생님, 제발 영어도 공부하셔서 일본어 가르치는 방법으로 영어도 가르쳐 주세요’라고요. 그래서 얼마 전부터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답니다. 지금처럼 열심히만 한다면 한 2~3년 뒤에는 일본어 강사 이예숙이 아니라 일본어 강사 겸 영어 강사 이예숙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김성주 객원기자 helieta@empal.com: 1967년생. 동방산업(주) 부속 혜천여고 졸업. 대전실업전문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일본 동양대 일문학과 학사 및 석사. 현재 YBM 강남 일어센터 강사. 저서 ‘일본어 천재가 된 홍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