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아이는 아버지를 따라나서는 길이 마냥 신나기만 하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따라나선 권투장, 야구장, 농구장…. 게임의 규칙도 몰라 경기를 즐길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지만 아버지와 함께했던 커다란 손의 느낌과 매번 만났던 열기는 두근두근 신나는 기억으로 어렴풋이 남아 있다.이제 딸을 데리고 집을 나서던 아버지의 나이만큼 그 딸이 나이를 먹었고, 지금의 나는 대학 졸업 후부터 점점 소원해졌던 아버지와의 대화 간격만큼의 세월의 무게를 느낀다. 내게는 늘 돌아갈 안식처 같이 넉넉한 분이셨던 아버지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보수적으로 변해 가셨고 대화 때마다 내 얘기를 들어주시기보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를 강요하셨다. 일방적이고 지나친 잔소리라는 불만과 권위적인 명령에 대한 반항으로 점점 더 아버지와의 소통은 멀어져만 갔다. 당신께서 소외감을 느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다시 언쟁을 벌이는 것이 싫어 예전 같은 깊은 대화는 피하려고만 했다.그러나 문득 떠오른 어린 시절 두 부녀만의 행복한 외출의 추억, 그렇게 시작해서 점점 떠오르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면 지금의 나의 성격 형성과 삶에 대한 태도들을 결정하는 중요한 자양분들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음을 이제야 깨닫는다.초등학교 입학 즈음,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낯선 환경에 움츠러든 나와 동생을 데리고 나가신 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을 모두 불러 모으셔서 직접 딱지치기, 구슬치기, 야구 등을 함께하시며 동생과 내가 아이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도록 애쓰셨다. 나와 동생은 그런 아버지의 든든한 ‘빽’을 믿고 동네 골목대장 노릇을 하며 새로운 친구들과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하고 새로운 집단에 들어가도 곧잘 그 집단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경향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이 분명하다.학교에 입학해서 소풍을 가거나 친구들과의 모임에 가는 날이면 아버지가 내게 늘 말씀하시던 것이 있다. “친구들에게 먼저 베풀어라. 어려운 친구들이 있으면 도와라, 모임에서는 네가 먼저 친구들을 챙겨라!” 친구들을 만나러 나간다고 하면 용돈을 쥐어 주시며 먼저 베풀 것을 말씀하셨을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시고 챙기셨다.바로 그 당시가 아버지 사업이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도 한참을 지나서야 알았을 정도로 부모님은 어려운 기색은 모두 숨기신 채, 내가 늘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셨던 것이다. 힘든 상황이나 시련이 닥쳐도 늘 긍정적일 수 있는 배짱 또한 바로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훌륭한 유산이다.아버지는 가끔 하모니카를 신나게 부시거나 큰소리로 노래를 즐겨 부르신다. 공연 감상도 좋아하시고 예술적인 멋과 향을 즐겨하신다. 내가 삶의 활력을 예술을 통해서 얻는 것도 아버지에게서 배우고 아버지를 닮은 것이리라.멀게만 느껴지던 아버지에게서 어렸을 때의 향수를 기억해 내며 수년 전 아버지가 내밀었던 편지가 다시 소통의 신호였음을 감지한다. 사업 초기 우여곡절들을 겪으며 좌충우돌하던 와중에 생일을 맞던 날,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지를 받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 아빠가 항상 너의 뒤에서 지키고 있으마. 너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도록 해라. 그러나 무슨 일이든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냉철한 판단력도 함께 키워야 한다.”부족한 딸은 지금까지도 감사하다는 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 편지는 내가 다시 힘을 내어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내가 나아갈 곳을 바라보게 하는 나침반이었다. 어렸을 때처럼 변함없이, 아버지는 다 커버린 딸에게도 여전히 든든한 버팀목이자 돌아갈 안식처 같은 분이다.가끔 일요일에 “등산 같이 갈까”라며 물어 오실 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게으름을 피우곤 했는데 이번 주는 꼭 아버지와 함께 가까운 동네에 있는 산이라도 올라야겠다. 당신이 내게 주신 위대한 유산들을 한 걸음 한 걸음 돌아보며.1994년 베비라 홍보실, 97년 춘천 애니타운 페스티벌 디렉터, 99년 인컴브로더를 거치며 홍보 전문가로서 실력을 다져 왔다. 2006년 크로스IMC 창업 이후 홍보 업계의 블루오션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