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음료 업계 덮친 M&A 열풍
맥주와 청량음료가 주력인 일본의 최대 식품 기업 기린홀딩스와 2위 회사인 산토리홀딩스가 합병을 추진 중이다.두 회사는 작년 말부터 물밑에서 교섭을 시작해 올해 안에 합병 합의를 목표로 협상을 벌이고 있다. 두 회사 매출을 합치면 총 3조8200억 엔(약 50조 원)으로 맥주 업계 세계 1위인 벨기에의 안호이저부시 인베브와 미국 코카콜라를 웃돈다. 또 음료 부문 세계 최대 회사인 미국의 펩시콜라, 최대 종합식품 기업인 미국의 크래프트 푸드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식품 업체로 부상하게 된다. 일본 내에서는 식품 업계 3위인 아사히맥주를 2.6배의 현저한 규모 차이로 따돌릴 수 있다.기린홀딩스는 1907년 창업해 산하에 국내 맥주 업계 2위인 기린맥주, 청량음료 3위인 기린베버리지, 일본 내 최대 와인 회사인 메르샨 등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작년 매출액 2조3035억 엔, 계속사업이익 1030억 엔을 올린 도쿄 증시 1부 상장사다. 종업원은 3만6500명이다. 1899년 창업한 산토리홀딩스는 비상장 기업으로 창업가의 자산관리 회사가 90% 지분을 갖고 있다. 일본 내 점유율 2위인 청량음료가 주력 사업으로 맥주 부문 3위, 위스키 분야에선 1위다. 지난해 매출액은 1조5129억 엔, 계속사업이익은 792억 엔을 기록했다. 종업원은 2만1000명이다.모두 창업 100년이 넘은 기린과 산토리의 합병 추진 소식에 일본 산업계는 크게 놀라는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두 회사 입장에선 불가피한 선택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저출산 고령화로 일본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강자 연합을 통해 경쟁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맥주의 경우 작년까지 4년 연속 일본 내 소비량이 줄어드는 등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다. 주류 중에선 맥주가 여전히 매출 1위이지만 인구 고령화, 젊은 층의 술 소비 감소, 와인과 소주 등 경쟁 주류의 성장 등으로 판매량은 갈수록 줄고 있다.그동안 주류 업체를 중심으로 일본 식품 기업들이 내수 시장 위축에 대응해 외국 업체들을 잇따라 인수하며 해외시장 진출을 모색해 왔던 것도 그런 배경이다.◇ 일본의 주요 주류·음료 회사들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해외시장 진출에 적극 나섰다. 최근 1~2년 사이 기린 아사히 산토리 등이 잇따라 동남아시아와 호주 등의 주요 맥주 업체나 음료 회사를 인수하거나 대규모 출자를 단행했다. 소비 감소로 일본 국내 시장은 더 이상 매출 확대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해 해외에서 활로를 찾겠다는 전략이었다.기린은 필리핀 맥주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한 연 매출액 838억 엔(약 1조1000억 원)의 산미구엘 지분 43.25%를 최근 인수했다. 인수가는 1000억 엔 규모다. 기린의 인수로 산미구엘의 최대 주주인 산미구엘 모회사의 지분은 기존 94.25%에서 51%로 줄었다. 기린은 산미구엘을 통해 고유 제품을 생산해 아시아 지역에서 판매할 예정이다. 일본의 ‘기린’이 아니라 아시아의 ‘기린’을 굳히겠다는 계산이다. 기린은 앞서 호주에서 2007년 11월 음료 업체 내셔널푸즈를 2940억 엔에 인수한 데 이어 유가공 회사 데어리 파머스도 840억 엔을 들여 사들였다.일본 국내 맥주 시장에서 기린과 수위를 다투는 아사히맥주도 해외 진출에 열성이다. 아사히는 올 1월 중국 맥주 업계 2위인 칭다오맥주의 주식 20%를 취득했다. 칭다오맥주를 통해 중국 전역의 판매망을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아사히는 베트남의 사이공맥주 출자도 검토 중이다.아사히는 작년 12월 영국 제과 업체 캐드버리의 음료 자회사인 스웹스의 호주 자회사를 735억 엔에 매수했다. 이 회사는 비주류 음료 부문에서 호주 2위 업체다. 앞서 아사히는 2004년에 한국의 해태음료를 인수했다. 산토리 삿포로의 해외 진출 의지도 만만치 않다. 산토리는 최근 뉴질랜드의 메이저 음료 업체 풀코어를 750억 엔에 매수했다. 동남아시아 음료 시장 공략을 강화하기 위해 2007년에는 태국 음료업체 티프코F&B의 주식 50%도 사들였다. 삿포로맥주는 2006년 캐나다 3위 맥주 업체인 슬리먼을 300억 엔에 인수해 매출량을 늘리고 있다.◇ 기린맥주 삿포로 등 일본 맥주 업체는 주류 시장 축소에 대응해 식품 사업에도 적극 뛰어들고 있다. 기존의 주류 영업망과 양조 기술을 활용해 연관성 있는 식품 사업을 새로운 수익원으로 키우겠다는 생각이다. 기린맥주의 완전 자회사 기린푸드텍은 2010년까지 맥주 이스트를 활용한 조미료 생산 공장을 세울 예정이다. 기린그룹은 13년 만에 일본에서 공장을 신설하는 것이다.아사히맥주와 삿포로는 식품 업체의 지분을 인수해 식품 사업에 발을 내딛고 있다. 아사히는 2005년 건강식품 업체 산웰을 인수하고 지난해에는 이유식 제조 업체 와코도를 사들였다. 삿포로는 저칼로리 감자 칩 제조업체 유니버스 푸즈의 지분 49%를 인수하는데 2억 엔을 투자했다.산토리는 기존에 있던 식품 사업의 비중을 확대했다. 이 회사는 건강식품 사업부의 매출을 2006 회계연도 270억 엔에서 2010년까지 500억 엔으로 두 배 가까이 늘릴 계획이다.이 같은 해외 진출과 사업 다각화에 힘입어 일본 주류 4사는 지난해 모두 영업이익을 냈다. 기린홀딩스는 매출이 전년 비해 28% 늘어난 2조3035억 엔을 달성해 1459억 엔의 영업이익을 냈다. 전년보다 21% 증가한 것이다. 아사히맥주는 매출이 1조4627억 엔으로 전년보다 0.1% 감소했지만 영업이익은 945억 엔으로 8.7% 증가했다. 당기순이익도 450억 엔으로 전년 대비 0.5% 늘었다.산토리는 매출액 1조5129억 엔(1.2% 증가), 영업이익 813억 엔(8.0% 증가), 당기순이익 320억 엔(33.2%)을 기록했다. 삿포로홀딩스는 매출이 4145억 엔으로 전년에 비해 7.7% 줄었지만 영업이익(146억 엔)과 당기순이익(76억 엔)은 각각 19%와 39% 늘었다.아사히맥주가 8년 연속 판매량 1위를 지킨 지난해 일본 맥주 시장의 최대 화제는 산토리가 맥주 시장 진출 46년 만에 삿포로를 제치고 만년 4위에서 3위로 올라선 것이었다. 산토리나 아사히 모두 기존의 맥주에 비해 맥아의 성분이 훨씬 낮거나 아예 맥아 ‘제로(0)’로 맥주 맛을 낸 싼값의 ‘제3의 맥주’로 절약 지향 소비자 공략에 성공한 덕분이다.기존의 맥주, 맥아 성분이 기존 맥주보다 적은 ‘발포주’와 ‘제3의 맥주’를 포함한 일본 내 맥주계 음료 시장의 지난해 점유율은 아사히가 37.8%, 기린이 37.2%, 산토리가 12.8%, 삿포로가 11.8%였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건 주류 업계만이 아니다. 내수 시장 축소의 영향을 똑같이 받는 식품 업계 전체가 위기 상황이다. 이 때문에 일본 식품 업계에선 이미 생존을 위한 짝짓기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일본 식품 업계에서는 2년 전 마루하그룹-니치로, 기린-교와푸드의 경영 통합을 계기로 업계 재편이 본격화됐다. 그런 가운데 일본 최대 유제품 제조업체인 메이지유업과 제과 업계 2위 메이지제과가 경영 통합을 단행했다. 두 회사는 합계 매출액이 1조1000엔(약 15조 원)을 넘어서 기린홀딩스 산토리 등에 뒤이은 식품 업계 5위 기업이 됐다.또 경영 재건 중인 쇠고기 덮밥(규동) 체인 업체 렉스홀딩스는 산하의 편의점 am·pm을 매각할 계획이다. 주력 사업인 외식 산업과의 시너지(상승) 효과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는 편의점을 매각해 경영 자원을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am·pm의 인수에는 로손과 패밀리마트 등 경쟁 편의점 업체들이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전문가들은 저출산·고령화, 도시권에서의 치열한 경쟁 등으로 편의점 시장이 날로 축소되고 있어 이번 매각이 업계 재편의 단초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전국 주요 편의점 매출은 2000년부터 2007년까지 8년 연속 전년 실적을 밑돌고 있다.업계 관계자는 “인구 감소라는 커다란 시장 변화의 흐름에 적응하기 위한 식품 업계의 변신과 재편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