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맞은 통·번역계
1997년 외환 위기로 대부분의 업계가 큰 타격을 입은 반면 통·번역 시장은 예외적으로 일대 호황을 맞았다. 위기 이후 해외 자본 유치를 위해 규제를 완화하면서 무수한 외국계 기업 자본이 국내에 대거 들어오고 국내 기업에도 외국인 임원의 수가 늘어나면서 통·번역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한 것이다.글로벌화로 외국인 방문객과 국제회의 수가 늘어난 것도 통·번역 수요에 대한 플러스 요소로 작용했다. 세부적으로 보면 2002년의 한·일 월드컵 특수는 월드컵과 관련한 통·번역뿐만 아니라 관광 및 경제·환경 관련 통·번역에 대한 수요까지 불러와 전체적인 통·번역 시장의 성장에 기여했다.시장의 수요는 공급의 확대로 이어졌다. 현재 통·번역 관련 대학원 수는 12개로, 여기에 학부 과정의 관련 전공 및 개별 수업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대학원의 경우 1979년 창설된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GSIT)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통·번역 전문 교육기관은 1997년에서 2005년 사이에 설립된 소위 ‘젊은’ 대학원이다.이는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전후해 급증했는데, 신규 대학원을 설립하는데 1년에서 2년 정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체로 2000년을 전후한 시점에서 설립 요구가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학부 과정을 보면 통·번역 관련 학과를 별도로 개설한 대학도 있지만 이화여대 중어중문과의 ‘중국어통번역연습’ 수업처럼 어문학 관련 학과에서 통·번역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역시 2000년대 이후 증가한 것이다.외환위기를 발판으로 성장한 통·번역업이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 이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경기 침체 때문에 대대적으로 인원을 감축한 탓에 기업이 가장 먼저 메스를 댄 곳이 통·번역 관련 부서이기 때문이다. 김한식 한국외국어대 통번역센터장(통번역대학원 한일과 주임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통·번역은 기업의 입장에서 볼 때 필수 지출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인원 감축의 주요 대상이 된다고 말한다.실제로 모 증권사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여파로 시달리던 2008년 말 담당 직원 8명 중 영어와 일본어에서 각각 1명씩 줄였으며 모 대기업은 통·번역 관련 채용 계획 자체를 백지화했다.기업의 채용 움직임도 둔화됐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Daum)의 최대 통·번역 관련 카페 ‘통번역대학원(cafe.daum. net/gsitgsit)’의 ‘통번역 구인’ 게시판을 살펴보면 채용 관련 게시물이 2007년에는 총 194건으로 월 평균 16.2건이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심화된 2008년 9월 이후 현재까지 채용 관련 글은 103건으로 줄었다. 월평균 9.3건 정도로 종전 대비 57% 수준으로 대폭 감소한 것이다.프리랜서 통·번역가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나마 최근 제주와 부산 등 지방자치단체가 국제회의 개최에 열을 올리고 있고 원화 약세로 인해 외국인 관광객 수가 증가하면서 프리랜서 통·번역가에 대한 수요가 다소 증가하고 있지만 2000년대 초·중반의 상황과 비교하면 아직 상당히 부족한 편이다.하지만 시장의 수요도 언어별로 천차만별이다. 한불과(한국어·불어 통·번역)는 사정이 다르다. 한국과 알제리의 경제협력이 본격화되면서 알제리의 공식 언어 중 하나인 프랑스어 통·번역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 것. 알제리의 부그졸 신도시와 부이난 신도시 건설 및 에너지·건설·플랜트 등에서 진출과 교류가 확대되면서 과장·대리·사원급의 프랑스어 가능자 ‘모셔가기’ 바람이 불고 있다.최정화 교수(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한불과 주임교수, 불어·영어 통역사)에 따르면 남성의 경우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불과 최근 졸업생 100%가 현지 파견과 같은 형태로 알제리 경협에 참여하고 있으며 여성은 현지에서의 활동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국내에서 국제회의 통역, 서류 번역, 입찰 관련 업무 등을 통해 직간접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또한 관련 업체에서 원하는 통·번역가의 수에 비해 통번역대학원 졸업생 수가 턱없이 부족해 일부 기업에서는 프랑스어를 전공한 학부 졸업생들을 채용하고 있기도 하다.이들에 대한 대우도 좋아 학부 졸업자는 연봉 6000만~8000만 원, 통번역대학원 졸업자는 8000만~9000만 원 정도다. 최 교수는 “한국·알제리 경협이 향후 20~30년을 바라보는 대규모 협력 사업이라는 점에서 지금의 한불과에 대한 수요 증가는 일시적 현상이라기보다 장기적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며 “앞으로 꾸준한 비전을 가지고 나갈 분야”라고 설명한다. 이는 통·번역 시장이 전체적인 경기 흐름과 유사한 양상을 띠고 있지만 이따금 일어나는 공공·민간 부문의 대규모 국제 사업 및 교류의 영향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특징 때문이다.프랑스어에 대한 수요 증가에 화답하듯 교육 기관들의 행보도 발 빨라 한국외대 통번역 대학원의 경우 1개 반으로 운영되던 한불과를 2개 반으로 확대 모집, 정원을 2배로 늘렸다.또한 최근 가시화된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해 김한식 통번역 센터장은 프랑스어·독일어·스페인어 등의 언어들도 유망하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FTA가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넓게 영향을 미치는 성격을 띠는 사업이니만큼 이들 언어에 대한 수요도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또한 한국 및 세계경제와 학술 연구 분야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한·중 통·번역 시장도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예측이다.하지만 통·번역 시장에서 프랑스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10% 미만이다. 전체 시장을 견인하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언제까지 경제 호전에 의해 통·번역 시장이 활기를 되찾기를 기다릴 수도 없다. 스스로 자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최 교수는 통·번역가 개인 역량의 강화를 주문한다. 통·번역 업계 자체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없는 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시장이 필요로 하는 통·번역’으로의 변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2005년 한·미 정상 기자회견에서 “경수로(문제)를 검토하겠다”는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경수로를 제공하겠다”고 통역해 논란이 일었던 사건에서 보듯 작은 실수가 큰 실패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은 업무 특성상 통·번역가 자신의 역량 부족이 업무 수주에 있어서 개인적 네트워크를 지속하기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통·번역 전체 이미지 실추와도 직결될 수 있다. 이는 곧 일부 국내 국제회의에서 이따금 일어나는 ‘통역 없이 진행되는 국제회의’와 같은 형태로 표현되기도 한다.최 교수는 “‘통·번역사 모셔가기’가 한창이던 2000년대 초·중반의 상황을 잊고 무한 경쟁 시대로 돌입한 통·번역 시장 현재의 모습을 직시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이에 덧붙여 박혜민(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한일통역학과 졸, 외교통상부 근무) 씨는 통·번역가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우선 환경·의학·법률·교육·문화 등 본인의 전문 분야를 개척하고 이에 대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또한 메시지 전달자로서 기존의 수동적인 자세에서 적극적으로 시장을 개척하는 자세도 요구된다. 김한식 교수는 공공기관 및 민간 기업에 홈페이지 내 외국어 번역 페이지 개설을 적극 권유하는 방법 등을 제시하며 “미래 통·번역 관련 업계는 시장의 여건에 따라 업계 분위기가 좌우되기보다 능동적으로 시장을 개척하는 자세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양충모 인턴 기자 gaddjun@gmail.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