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사모 펀드
프라임급(연건평 3만㎡ 이상) 수익형 빌딩 시장은 기업 인수·합병(M&A)과 닮은 점이 많다. 우선 매수자를 찾기 편한 데다 현금 유동화가 쉬워 기업의 가치를 매길 때 부동산은 자산 평가 1순위로 꼽힌다. 단기 유동성을 겪는 기업들의 우량 자산을 매각해 임대차 계약만 새롭게 하면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 일반 기업 M&A가 경영권과 영업력 개선을 통해 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쉽다.실제로 지난 1998년 외환위기 직후 국내 프라임급 오피스 빌딩 등은 해외 투자자들의 주요 투자 대상이었다. 지난 1999년 여의도 고려증권 사옥이 980억 원에 미국 휴렛팩커드에 팔린 것을 시작으로 국내 상당수 오피스 빌딩들이 거대 외국 자본에 넘어갔다. 당시 거래된 매물을 보면 지금도 하나같이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건물들이다. 역삼동 스타타워, 태평로 서울파이낸스빌딩 등이 당시 외국계 유명 투자 펀드들에 매각된 물건들이다.그러나 지난 몇 년 사이 시장 상황은 달라졌다. 간접 투자 시장이 커지면서 국내 증권사, 보험사, 자산운용사들이 대항마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관련 업계에서는 경기 침체로 알짜 부동산이 매물로 나오는 현 상황을 ‘10년 만에 찾아온 기회’로 여기는 모습이다. 기업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 부동산 매각으로 현금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커질 수밖에 없고, 물량 증가로 인수 가격이 하향 곡선을 그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하지만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은 예전만 못하다. 과거 외환위기 때처럼 기업들의 재무구조가 급격하게 악화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수익을 기대하기 힘들다. 여기에 토종 부동산 펀드들의 강력한 도전이 예고되고 있다는 점도 커다란 변수다. 지난 3월 매입 작업을 완료한 제이알자산관리는 구조조정용 매물을 국내 토종 부동산 사모 펀드가 매입한 첫 사례로 꼽힌다. 제이알자산관리가 주도가 된 기업 구조조정 부동산 투자 회사는 신문로 금호아시아나 1관을 5년 뒤 금호아시나아 계열사인 대우건설에 재매각하는 옵션 조항을 달아 건물 전체를 매입했다.사모 형식으로 자금을 조달한 이 펀드에는 우리은행, 기업은행이 특수목적회사(SPC)를 설립해 1200여억 원을 투자했으며 삼성증권 경찰공제회 전문건설공제조합 등 연기금, 기관투자가들도 대거 참여했다. 제이알자산관리는 이방주 전 현대산업개발 사장이 회장으로 이 전 사장은 자산 1조 원의 큰손인 이민주 에이티넘 파트너스 회장과 형제지간이다. 이 회장은 케이블방송 씨앤앰(C&M)의 경영권 지분을 팔아 1조 원 가량의 차익을 거둔 M&A 업계의 신화적 인물이다. 당사자들은 적극 부인하고 있지만 관련 업계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 회장이 펀드 조성에 상당히 기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그동안 토종 부동산 사모 펀드들은 주로 고수익이 보장된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에 전념해 왔다. 하지만 부동산 경기 침체로 PF 자금이 부실화되면서 대체 투자재이면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실물 부동산 매입으로 투자 패턴을 바꾸고 있다. 이들 부동산 사모 펀드가 기업 M&A 사모 펀드와 다른 점이 있다면 프로젝트 펀드 성격이 짙다는 점이다. 자산운용사(AMC)가 매입 우선권을 따낸 뒤 사모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이처럼 국내 토종 부동산 사모 펀드들이 속속 가세하면서 외국계 투자 펀드들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한국 시장 진출을 타진하는 해외 기관투자가 수도 과거에 비해 3~4배 이상 증가했다. 이들 업체가 예전과 비교해 달라진 점이 있다면 단기 고수익보다 중·장기 저수익 구조로 투자 패턴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단타 거래로는 기대 수익률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국내 오피스 시장이 매력적인 이유는 전 세계가 불황에 휩싸였지만 아시아 시장은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은데다 오피스 공실률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낮다는 데 있다. 임대료도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일반적인 기조와 달리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부동산 투자 컨설팅 업체 세빌스 코리아(Savills Korea)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올 1분기 서울 프라임 오피스 빌딩 공실률은 2.2%로 반년 전에 비해 1.2%포인트 상승했다. 이는 지난 2006년 4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임대료 인상률도 전년도 같은 기간 대비 4.9%를 기록했다. 앞으로의 시장도 낙관적인 전망이 우세다. 경기 침체로 오피스 공급이 줄고 수요가 커지면서 값이 오르는 양상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당분간 오피스 임대 수요가 안정적인 기조를 보인다는 것은 외국계나 토종 부동산 펀드들의 구미를 당기는 부분이다. 오히려 행보만 놓고 보면 토종 부동산 사모 펀드들의 움직임이 더 적극적이다. 지난해 4분기 서초동 호혜빌딩의 주인은 다국적 투자 펀드인 제너럴일렉트릭 리얼에스테이츠(GERE)에서 국내 자산운용사 알파에셋으로 바뀌었다. 알파마이티사모부동산12가 199억 원에 매입한 이 건물은 연면적이 9319㎡로 중형급에 속하지만 임대 수익이 안정된 서초동에 있다는 점이 강점으로 꼽힌다. 서초동 플래티넘타워도 건물주가 CR리츠 전문 회사인 코크렙에서 KTB컨피던스사모부동산투자신탁으로 바뀌었다. KTB사모 펀드에는 국내 기관투자가 외에도 싱가포르 사모 펀드인 알파파트너스가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SK건설이 판 관훈동 SK E&C 사옥은 1060억 원에 엠플러스사모부동산투자신탁1호에 팔렸다.여의도 동양종금증권 빌딩은 도이체방크 계열의 리프(RREEF)에서 삼성생명이 주도한 부동산 사모 펀드로 주인이 바뀔 전망이다. 현재 최종 인수 작업이 진행 중이다. ING부동산자산운용이 소유하고 있던 역삼동 ING타워는 최근 KB부동산신탁이 4000억 원에 매입했다. KB부동산신탁은 현재 인수 자금 확보를 위해 기관투자가를 중심으로 한 사모 펀드를 준비 중이다. 이 밖에 몇몇 자산운용사들도 오피스텔, 오피스 빌딩 등에 주로 투자하는 거액의 부동산 펀드를 사모 방식으로 조성하고 있다.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이 보유하고 있는 대치동 퍼시픽타워, 동자동 게이트웨이 빌딩, 서린동 알파빌딩도 매물로 거론되고 있다. 퍼시픽타워는 올해 말, 게이트타워, 알파빌딩은 내년 6월 펀드 청산을 앞두고 있어 서둘러 매물을 처분할 계획이다. 프라임산업은 강변역 근처에 프라임산업이 지은 강변테크노마트 매각을 조심스럽게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은행 잠실전산센터,여의도 MBC경영센터와 두산인프라코어, 상암동 DMC 내에 있는 DMC KGIT빌딩, 삼성동 M타워도 주목받는 물건 중 하나다.세빌스코리아 한국희 상무는 “기업, 거액 자산가들이 중소형 오피스 빌딩을 주도한다면 연기금, 부동산 사모 펀드 등 기관투자가들은 프라임급 대형 빌딩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이라며 “연 수익률은 6% 선으로 전망되지만 임대 수요가 안정적이고 공실률이 전 세계 그 어느 국가보다 낮다는 점 때문에 고가 입찰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송창섭 기자 realsong@kbizweek.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