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에 아버지는 흥남에서 수송선(LST)을 타고 월남하셨다. 1951~52년에 부산 국제시장에서 미제 물품을 팔며 하루하루를 고되게 살아가시다 1953년 대학에 입학하셨다.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공무원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하셨으며 필자가 어린 시절을 보낸 1960년대에는 대전에서 지내셨다. 그러다가 1969년에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그 이유는 1970년에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는데 공부는 서울 가서 해야 한다는 신념 하나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다니시던 직장마저 그만두시고 나 때문에 가족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그 이후 아버지는 은행에 취직하셔서 20년을 넘게 다니셨다. 필자가 학교에 다닐 무렵, 한국의 여느 부모가 그러하듯이 아버지도 자식 교육에 열정을 모두 바치셨다. 필자가 고등학교 갈 때였다. 그때 서울은 고등학교를 추첨으로 가는 시대였다. 그런데 좀 더 좋은 고등학교에 보내려고 그 당시 시험으로 고등학교를 들어가던 지방 도청 소재지까지 전근을 가시려고 하셨다. 비록 어머니가 반대하셔서 아버지와 나의 지방행은 취소되었지만.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갔을 때는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1980년대였다. 그 당시 대학가는 4~5월만 되면 공부를 할 수 없었다. 4·19, 5·18로 이어지는 데모 기간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필자도 데모하다가 경찰서에 붙잡혀 갔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오셔서 데려가곤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버지가 얼마나 속을 태우셨을까 하는 생각에 한없이 가슴이 아프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다. 내색 한 번 제대로 안 하셨기 때문이다.필자가 나이가 들고 결혼한 뒤에 자식들을 키우면서 젊은 시절 아버지를 통해 깨달은 교훈이 있다면 ‘자율과 책임’이다. 아버지는 필자가 어린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셨으며 대학시절에도 데모를 절대 하지 말라고 강조하지도 않으셨다. 그저 항상 필자가 가고자 하는 길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셨다.일부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필자는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그리고 성적이 좋게 나오지 않아도 그렇게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집안의 자율적인 분위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지식인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자세가 더 요구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아버지가 1970~80년대에 은행을 다니셨듯이 필자와 필자 동생은 모두 증권 회사를 다닌다. 동생은 채권 브로커다. 우리 형제의 공통점은 고집이 무척 강할 뿐만 아니라 하는 일에 대한 책임감 역시 누구보다 강하다는 것이다. 아버지부터가 맡은 바 책임을 모두 다하시는 성격이다 보니 본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재무부 장관상과 더 나아가 국민포장까지 받을 정도로 금융권에서 큰 업적을 쌓으셨다. 그런 은덕에 필자 역시 애널리스트(analyst)로서 과분할 정도로 명성을 얻게 됐다.또 필자 동생 또한 채권 전문가로 대견할 정도로 지위를 쌓아가고 있다. 이것도 아버지가 묵묵히 몸으로 실천하는 귀감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그런데 필자 인생에 있어 여러 모로 귀감이 되셨던 아버지가 지금은 편찮으시다. 올해 연초 심장 수술을 받으셨는데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며칠 전 또다시 수술을 받으셨다.인생은 묘한 사이클을 갖고 있다. 필자가 자식들을 낳고 금융권에서 생활하면서 아버지 인생을 비로소 이해하고 존경할 때가 되니까 편찮으시다니 마음이 아프다. 이제는 정작 아버지와 같이 지낼 날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걱정이 앞선다. 무엇이든 느끼고 깨우칠 때가 되면 이별하는 것이 인생을 사는 세상의 묘한 섭리다. 그런 사이클에 있어 가장 극적인 예가 아버지와 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남자에게 있어 죽을 때까지 항상 되돌아보고 그리워하게 되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1964년생. 93년 대신증권 기업분석실 애널리스트. 97년 교보증권 리서치센터 기업분석팀장. 2003년 우리투자증권 리서치센터 기업분석부장. 2006년 KB투자증권 상무. 2009년 유진투자증권 전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