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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 전통적으로 한국 정치권을 규정한 말이었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개념도 많이 바뀌었고 그 범위에 대한 논란도 적지 않아 이제는 빛바랜 말일지 모른다. 예전에는 ‘차떼기’다 뭐다 해서 이 말처럼 보수 정파엔 청렴성과 투명성이 문제였는데 근래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면 이게 뒤바뀐 것 같다. ‘친이’ ‘친박’ 하면서 나눠진 이후 끊임없이 다투는 한나라당 사정을 보면 보수 쪽이 오히려 분열돼 존재와 지지 기반을 스스로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4월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본격화됐던 여권의 책임 공방과 분열상은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한 차원 더 심각해진 상황이 된 듯하다. 물론 당내 주도권 싸움과 이념 갈등이 현대 정당에서 낯선 일은 아니다. 책임 공방 역시 선거라도 한바탕 치른 뒤면 수없이 봤던 현상이다.그러나 최근 상황은 좀 심하다는 게 많은 유권자들의 판단인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나라당이 5년 만에 민주당보다 지지율이 더 낮아진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내년에는 정치적 의미가 적지 않은 지방선거가 있는데다 그럭저럭 총선과 대선도 줄줄이 다가올 것이니 정치권이 술렁거리는 것이라고 보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이 모두가 평상시 얘기다. 아직도 경제 위기가 끝나지 않았건만 경제는 뒷전이다. 경제 위기 극복 노력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예 보이지 않는다.그렇다면 지금 정치권의 행태는 분명 문제가 있다. 상당히 중증 질환이다. 한마디로 여권은 집안싸움으로 날을 새우느라 민생 경제를 뒷전으로 미뤘고, 야권은 거리로 뛰쳐나갈 것 같은 분위기에서 6월을 맞았다. 6월 1일 임시국회를 열지 않은 것부터가 실정법 위반이었다. 국회법 제5조2항에는 8, 10, 12월을 제외한 짝수 달 1일에 임시국회를 열도록 명시하고 있다.법안 처리가 막연히 미뤄지면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문제는 그 대가가 여야 정당과 의원들 몫이 아니라 민초들, 특히 경제적 약자들에게 집중된다는 점이다.비정규직법이 대표적인 사례다. 2007년 7월 발효된 비정규직법은 2년 이상 같은 직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한 근로자는 만 2년 뒤인 7월부터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같은 초불황기에서는 정규직으로 전환은커녕 계약직마저 해지될 공산이 크다. 가뜩이나 실업률이 고공행진인데 한 달에 어림잡아 수만 명의 근로자가 멀쩡히 일하던 일터에서 내몰릴 가능성이 매우 커진 것이다. 그래서 지난 4월 정부 주도로 현행 2년인 비정규직 고용 시한을 4년으로 늘리기 위한 비정규직법 개정안이 마련됐다. 그런데도 국회는 6월 초 소중한 시간을 허송세월하면서 법안 심의를 하지 않았다. 이 법만이 아니다. 개정안의 처리 지연으로 정부 재정에 부담을 가중시키는 법안도 있고, 법안 처리가 안 되면 구조조정 과정에서 주기로 한 세금 감면이 되지 않는 사안도 있다.개원이 늦어지면서 심의 일정이 빠듯해지고 시일에 밀려 심의에 허둥지둥할 수밖에 없다. 회기 마지막이면 늘 보는 풍경이다. 졸속 심의를 하다 보니 회기 막바지에 법안 끼워 넣기 시비니, 날치기니 하는 낯 뜨거운 싸움만 되풀이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높다.국회가 제때 열리지 못한 데는 과반수 여당의 리더십·정치력 부재가 큰 원인으로 보인다. 4월 재·보선 이후 불거졌다가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본격화된 듯한 계파 싸움과 쇄신 논쟁은 지켜보기에도 딱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보수가 분열로 무너지는 시대가 됐다’고, ‘정치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지경’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논평하는 것이다. ‘서민 실정 모르는 웰빙 정당’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세상과 동떨어진 집안싸움을 빨리 정리하고 국회 정상화 방안부터 일찌감치 강구했어야 했다. 제1야당이라는 민주당도 물론 정치가 실종된데 대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국회 운영과 직접 연계하면서 국회를 공전시켰고 이런저런 이유로 길거리로 나가려는 궁리나 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냉정하게 자문해 볼 일이다.소비나 몇몇 지표들이 일시적으로 좋아진다지만 아직도 경제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북한의 움직임도 여전히 불안하다. 외우내환의 이 상황에서 국회가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인지, 의원들 스스로 찾아야 한다.허원순·한국경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