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걱대는 관대한 이민정책

‘영국 일자리는 영국 노동자들에게로!’유럽에서 경기 침체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고 있는 영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배척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일부 제조업과 에너지 분야 노동자에 대한 구인난으로 다시 이어져 최근 제조업 부활을 선언한 영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최근 불거진 논란은 웨일스 소재 초대형 액화가스 터미널인 ‘사우스 후크 (South Hook)’ 노동자들이 일자리 보장을 요구하는 집단 파업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 액화가스 터미널은 중동을 통해 영국으로 가스가 유입되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곳을 거치는 물동량만 연 110억㎥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 시설을 자랑한다.파업에 나선 현장 노동자들은 회사 측이 영국 노동자들을 우선 고용하기로 한 노사 합의를 어기고 최근 저임금의 폴란드 노동자들을 대거 고용함으로써 노사 갈등을 촉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회사 측은 프로젝트가 시작될 당시 회사가 필요로 하는 기술력을 갖춘 영국 노동자들을 구하기 어려워 과거 프로젝트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외국 노동자를 고용했을 뿐이라며 맞서 왔다.그러나 이번 사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개별 회사의 고용 합의를 뛰어넘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유럽연합(EU) 출범 이후 영국 사회에 유입된 동유럽의 저임금 노동자 고용에 대한 영국 노동자들의 위기감이 이번 사태를 촉발한 근본 원인인 것이다.당초 ‘사우스 후크’에서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200여 명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이 파업은 삽시간에 영국 전체로 번져 약 2500명의 중공업 분야 노동자들이 연대 및 동조 파업에 들어갈 정도로 위력을 과시했다.이 같은 기세에 놀란 회사 측이 우선 이미 고용한 외국 노동자 일부를 대기 발령하는 대신 비슷한 숫자의 영국 노동자로 빈자리를 충원한다는 긴급 대책을 발표하고 나서야 노동자들이 현장으로 돌아갔다. 파업을 주도했던 노동조합 측은 회사 측으로부터 영국 노동자들이 ‘공정한’ 기회를 보장받았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내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일자리 보장을 요구하는 비슷한 파업은 올해 초에도 벌어졌었다. 영국 에너지 분야 노동자 수천 명이 지난 1월 말부터 린제이 정유 공장의 외국인 노동자 고용에 반대해 전국적 동조 파업에 들어간 것이다. 이 당시 역시 사태의 발단은 이탈리아 기업 IREM이 정유 공장 내 신규 단지 하도급 계약을 따낸 후 임금이 싼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출신의 이민 노동자들을 대거 고용하면서 시작됐다.이번 파업의 도화선이 된 웨일스 LNG 터미널 노동자들도 당시 연대 파업에 참여했으며 웨일스 사태가 터지자 이번에는 당시 파업을 주도했던 정유 공장 노동조합이 적극 나서 동조 파업을 주도한 것이다.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 유입에 대한 영국 노동자들의 위기감이 지역과 업종에 관계없이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다는 얘기다.정부의 불법 파업 경고에도 불구하고 최근 영국 노동자들이 잇달아 동맹 파업에 나서는 데는 외국인 노동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내국인 노동환경이 한몫했다.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영국인 취업 인구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5만 명(1.8%) 줄어들었으나 외국 출신 취업 인구는 오히려 13만 명 정도(3.5%)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실업자가 증가하는 속도 역시 외국인에 비해 내국인이 훨씬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그래프 참조).노동자들은 특히 지난 2007년 고든 브라운 총리가 “영국인들에게 영국의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한 공약을 거론하며 총리의 약속 불이행을 문제 삼고 있다. 그러나 브라운 총리는 자신의 발언은 영국 노동자들의 기술 수준을 포함한 구직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것이었을 뿐 다른 EU 국가의 이민 노동자들을 배척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고 해명하고 있다.정부와 노동조합 측의 공방을 반영하듯 최근 경제문제를 넘어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되고 있는 동유럽 노동자 문제를 보는 시각은 영국 사회에서도 확연히 갈린다. 보수적 목소리를 대변하는 그룹은 2000년 이후 영국 정부가 고용 허가를 남발해 동유럽에서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 일자리를 잠식해 가고 있다며 정부 책임론을 내세우고 있다. 차기 총선에서 집권이 유력해 보이는 보수당은 물론 경기 침체 분위기를 타고 보호주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극우 세력들도 이런 흐름에 목소리를 보태고 있다.그러나 노동당은 이슬람 테러 확산 등의 영향으로 이민 정책의 문호를 규제하는 가운데에서도 영국 산업을 위해 필요한 인력을 수입하는 데는 문호 개방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EU의 경제 정책을 조율하는 EU 집행위원을 역임했던 피터 만델슨 영국 산업장관은 “영국 기업이 다른 유럽 국가에서 활동하고 유럽 기업들이 영국에서 자유롭게 사업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EU의 정신”이라며 보호주의가 득세할 경우 경기 침체가 더욱 장기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흥미로운 것은 동유럽에서 영국으로 유입되는 노동자 숫자가 최근 들어 감소세에 접어들었는데도 외국인 노동자들을 배척하는 목소리는 오히려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지난 2007년 15만 명에 이르렀던 폴란드 노동자들의 영국 유입이 지난해 10만 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경제의 미래를 불안하게 여긴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츰 영국을 등지고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2011년 이후 독일 프랑스 등 다른 유럽 국가들이 이민 정책을 완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어서 동유럽 노동자들의 영국 선호 현상은 더욱 줄어들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이러다 보니 경제계에서는 노동계와 달리 영국 경기 침체의 여파와 내국인 노동자들의 외국인 기피증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용하면서 경기 회복의 발목을 잡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최근 산업별 경영자 단체인 ‘언스트 앤드 영 아이템스 클럽(Ernst & Young Items Club)’이 발표한 보고서도 이런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언스트 앤드 영의 보고서는 최근 들어 속도가 빨라진 동유럽 외국인 노동자들의 감소세가 결국 영국 경제의 회복 속도를 늦추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최근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영국 정부가 금융 산업에 지나치게 의존해 온 산업구조를 탈피해 제조업에 대한 신규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민 노동자의 유출은 이러한 경고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일선 기업인들의 우려는 더욱 직접적이다. 파이낸셜타임스와 인터뷰한 한 이란 출신 기업인은 “느지막하게 출근해 쉬엄쉬엄 일하는 영국 노동자보다 일찌감치 출근해 개미처럼 일하는 동유럽 노동자들을 선호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냐”며 복지국가 노동자들의 나태함을 질타하기도 했다.이 기업인의 말처럼 그동안 많은 영국인들은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영국 경제의 성장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1980년대 독일 건설 노동자로 일해 왔던 수많은 영국인들을 떠올리며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관대한 시선을 유지해 온 것도 사실이다. 지금도 어림잡아 200만 명 정도의 영국인이 다른 EU 국가에서 생활하고 있다.그러나 최근 잇따른 파업에서 보듯 이러한 사회적 합의는 최근 경제 위기를 맞아 서서히 붕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제조업 부활을 선언한 영국 정부와 경기 침체 탈출이 급선무인 경제계 모두 예상되는 인력난을 앞두고 해법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성기영·영국 통신원(워릭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 sung.ki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