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에게 아버지는 항상 금기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사상적으로 좌익이거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금기였던 이유는 그가 부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정신적 언저리에만 존재했지 현실의 공간에서는 부재한 상태였다.아버지의 부재를 채워 주는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부재했고 그 자리에 항상 할아버지가 존재했다. 그런데 문제는 할아버지도 사실상 부재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항상 바쁘셔서 집에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우리 집에는 부성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의 모든 일은 대가족 집안의 며느리인 어머니의 몫이었다. 따라서 어머니의 고생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지난 5월 5일부터 7일까지 할아버지의 출생지인 경남 산청에서는 그를 추모하고 업적을 기리는 ‘제3회 기산국악제전’이 성대하게 열렸다. KBS 국악한마당 촬영팀이 중요 공연을 녹화 방영했으며 경남 지역의 서경방송이 TV로 녹화 중계했다. 산청군은 할아버지의 생가와 주변 땅을 매입하고 생가 복원과 박물관 건립을 연차적으로 시행하기로 결정하고 토지 매입도 끝마쳤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가족을 전혀 돌보지 못할 정도로 바빴던 사유가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이번 국악제는 국악학과의 대학교수나 국악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성장한 할아버지의 제자들 250여 명이 총출동해 행사를 이끌었다.이날 문화 행사 프로그램에는 ‘기산학술포럼’도 포함됐다. 필자도 가족의 입장에서 기산을 회고했으며 문화 예술 분야의 권위자들(현재는 대학 총장 등)이 앞장서 기산의 공적을 기렸다. 중요한 것은 발표자 중 두 분이 그동안 집안에서 금기시했던 아버지의 이름을 거론했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도와 일제강점기 때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민요와 판소리, 그리고 잡가 등을 수집하고 녹음기에 옮겨 담았다. 또 이미 없어져서 전하지 않는 악기와 전래 악기의 단점을 보정하는 새 악기 제작을 완성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기록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우리의 전통 가락의 창법과 장단 등도 새롭게 정리해 책으로 펴냈다.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도와 이 땅에 최초로 국악예술학교와 국악관현악단을 세우고 인간문화재라는 제도도 만들었다. 그 와중에 큰 병을 얻어 병원에서 몇 년을 보내다가 일찍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는 현실에서는 부재 상태였지만 정신적 유산으로 항상 남아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두 가지 기억이 또렷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 병원을 찾아가 눈물을 흘렸다. 남자는 눈물이 헤프면 안 된다는 꾸짖음과 함께 할아버지의 민족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대학에 진학할 무렵 우리 가족에게 닥친 두 분의 부재는 엄청난 가난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가장으로서 두 동생의 학비를 벌어야 했고 자신의 대학 등록금도 과외 지도의 아르바이트로 충당해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은 큰 용기로 작용했다.할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중학생인 필자를 불러 한학에 대해 강론했다. 특히 공자의 예를 들면서 공자는 평생에 두 번 울었는데, 아들인 백리가 먼저 죽어 혈통이 끊어질까 우려했고, 두 번째는 제자인 안연이 죽었을 때 학문이 끊어질까 하는 걱정 때문에 상심했다는 요지였다. 하지만 공자(孔子)의 학통은 자사(호는 子思, 본명은 孔伋)를 거쳐 맹자(孟子)로 이어졌는데, 그가 바로 ‘공자의 손자’인 것이다. 한학의 대가였던 연민 이가원 박사는 필자에게 호를 내려주시면서 기산(岐山)의 대를 이어 우리 민족 예술과 한국 문화를 진작시키라는 의미에서 ‘소산(韶山)’을 서체로 써 주셨다. 지금도 연구실에 걸려 있는 ‘소산’이라는 글을 바라보면서 과연 손자와 자식으로서 제대로 ‘기산 정신’을 이어받고 있는지 반성하고 있다.연세대 대학원 문학박사. 미국 미시간주립대 객원교수. 동아일보 ‘건강한 인터넷운동’ 국민운동본부장 역임. 정지용축제 운영위원 겸 홍보이사. 한국방송대 울산 지역대 학장. 한국방송대 국문학과 교수(현). KBS 라디오 ‘출발동서남북’ ‘서울의 문화 읽기’ 수요 인터뷰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