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타의 반성과 눈물
“한국의 현대자동차가 중국 인도 중동 등 신흥국에서 약진하고 있는 요인을 집중 연구하고 있다.”일본 도요타자동차의 고위 관계자는 최근 기자와 만나 ‘도요타의 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런 말을 전했다. 그는 “세계 동시 불황으로 주요 자동차 회사들이 대부분 30~40%의 판매 감소로 고전하고 있는 가운데 현대차는 비교적 선전하면서 각국의 시장점유율을 넓히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그는 또 “신흥국의 경우 환경 규제 등이 천차만별이고 시장 여건이 모두 다른 데도 불구하고 현대차는 시장 수요에 맞는 적절한 모델을 신속히 투입해 성공하고 있다”며 “그런 전략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필요한 것은 벤치마킹하려고 한다”고 말했다.그동안 ‘가이젠(改善)’과 ‘간반방식’으로 대표되는 도요타 생산 시스템(TPS) 등 혁신적인 경영 방식을 각국 기업들에 전파해 온 도요타가 다른 나라 자동차 회사를 배우겠다고 나선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현대차의 주요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도요타가 현대차를 역(逆) 벤치마킹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지난 5월 8일 도요타가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에 창업 이후 처음으로 4369억 엔(약 5조6000 억원)의 순손실을 냈다고 공개하자 회사 안팎에서 ‘패인 분석’이 분분하다. ‘세계 최강’으로 불리던 도요타가 하루아침에 수천억 엔의 순손실을 내는 적자 기업으로 전락한 이유는 뭘까.물론 ‘도요타 위기론’에 대해선 엄살이란 지적도 많다. 작년 말 현재 12조3000억 엔(160조 원)의 내부 유보금을 비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 세계 동시 불황으로 받은 타격이 다른 회사에 비해 훨씬 크다는 점은 도요타로선 반성할 점이란 지적이다. 올 들어 4월까지 미국 시장에서의 신차 판매 감소율은 도요타가 38.4%로 현대·기아차(마이너스 3.7%)나 폭스바겐(마이너스 17.9%)은 물론 혼다(마이너스 31.9%) 닛산(마이너스 35.8%)보다 컸다.◇ 도요타의 지금 위기는 역설적으로 지난 5~6년간의 급성장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도요타는 2001년 이후 2007년까지 세계 자동차 판매가 334만 대 늘었다. 혼다 규모의 회사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보통 자동차 공장의 연간 생산 대수가 30만 대이기 때문에 6년간 공장 10개가 늘어난 것과 같다. 그 기간의 매출은 11조 엔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2배, 순이익은 3배로 불었다. 이런 고속 질주에 맞춰 도요타는 전 세계에서 연간 1000만 대를 생산할 수 있도록 설비를 확장했다.그러나 전 세계 불황으로 수요가 얼어붙으면서 자동차 판매가 급감했다. 도요타의 올해 판매 목표는 650만 대로 6년 전 수준이다. 졸지에 공장 10개가 필요 없게 된 셈이다. 그렇다고 공장 문을 당장 닫고 사원들을 다 내보낼 수도 없다. 결국 브레이크 없는 무리한 확장의 결과는 고스란히 손실로 돌아왔다.도요타가 급팽창하는 과정에서 ‘대기업병’에 걸렸다는 지적도 나온다. 도요타자동차 본사가 있는 도요타시에서 빠찡꼬(성인용 구슬 게임) 체인점을 하는 스즈키 요이로 사장은 올 1월 도요타에 전화했다가 불같이 화를 냈다. “정말 차를 팔 생각이 있나. 영업맨의 프라이드도 없나.” 도요타가 힘들다기에 이웃 기업으로서 렉서스 100대를 팔아 줄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업 담당자를 오라고 했더니 “감기에 걸려 몸이 좋지 않으니 나중에 가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스즈키 사장은 “당신 선배들은 구두 밑창이 닳도록 뛰었다”는 훈계를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스즈키 사장은 지금 도요타가 위기에 처한 데는 세계 경기 침체와 엔고라는 더블 펀치가 최대 요인이지만, 지난 7~8년간 급성장 과정에서 변질된 경영 스타일이 피해를 키웠다고 지적했다.과거 도요타는 엔지니어에게 ‘하루에 3번 손을 씻으라’고 교육했다. 하루에 3번은 현장에 나가서 자신이 설계한 자동차가 제대로 제조되고 있는지 눈과 손으로 확인하라는 뜻이다. 도요타의 전통인 ‘현지현물(現地現物)주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말이 사라졌다. “회색 작업복을 입고 손에 기름 때 묻힌 사원은 뒤로 밀린 반면 영어 잘하고 프레젠테이션이 장기인 사원만 대우받았기 때문이다.”(도요타 간부)◇ 미국 의존도가 컸던 것도 문제로 꼽힌다. 2007년도 도요타의 총판매 중 북미 시장이 차지하는 비율이 33.2%에 달했다. 일본(24.5%) 유럽(14.4%) 아시아(10.7%)에 비해 월등히 높다. 지난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파문 이후 경기 침체의 골은 미국이 가장 깊었다. 도요타의 타격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도요타의 2008년도 지역별 판매 감소폭은 미국이 74만6000대로 일본(24만3000대) 유럽(22만2000대)에 비해 3배 이상 컸다.높은 미국 의존도는 재기에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불황 속의 세계 자동차 시장은 중·소형차를 중심으로 수요가 되살아나고 있다. 독일의 폭스바겐, 이탈리아의 피아트, 한국의 현대차 등 최근 약진하고 있는 회사들의 공통점도 중·소형차에 강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도요타는 미국 시장에 집중하다 보니 주력 차종이 중·대형 고급차다. 렉서스가 대표적이다. 여전히 중·대형차 시장은 한겨울이어서 도요타의 고전도 이어지고 있다.위기 판단이 늦었다는 지적도 있다. UBS증권의 요시다 다쓰나마 수석 애널리스트는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지자 다른 회사들은 2~3m의 쓰나미도 우려해 미리 피했다. 도요타는 5m의 방파제를 갖고 있어 피하지 않았지만 실제 덮친 쓰나미는 10m짜리였다”며 도요타의 상황을 설명했다.지난해 11월 초 중간 결산 보고 회의에서 일부 임원이 시장 상황이 심각하다며 생산 구조조정을 주장했지만 무시됐다. 당시 기노시타 미쓰오 재무담당 부사장은 “결산 대책을 의논하는 회의에서 그런 얘길 왜 하느냐”며 논의 자체를 막았다는 후문이다. ‘와타나베 가쓰오 사장-기노시타 부사장’ 라인이 초기에 위기의 심각성을 너무 가볍게 봤다는 비판도 있다. 6월 주총에서 창업자 증손자인 도요다 아키오 부사장이 사장에 승진하는 것과 동시에 와타나베 사장과 기노시타 부사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예정이다.◇ 수렁에 빠진 도요타를 건져낼 사명을 띠고 6월 말 주주총회에서 신임 사장에 취임할 창업 가문 출신의 도요다 아키오 부사장은 요즘 입만 열면 ‘현장’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지난 1월 말 사장 내정이 발표된 회견에서 “70년의 도요타 역사에서 이어져 내려온 DNA는 현장이 강하다는 것이다. 현장에 모든 힌트와 해답이 있다. 차에 직접 타 보고,판매 최전선과 대화하고,땀 흘리는 생산 현장을 보고,더욱 좋은 차를 만들 것이다. 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장이 되겠다”고 선언했다.그는 곧바로 직속에 ‘내일의 도요타를 생각하는 모임’이란 프로젝트팀을 만들어 위기 극복 전략을 짜고 있다. 특징은 이 팀을 제조 판매 등 현장에서 뽑은 40대 젊은 간부들로 채웠다는 점이다. 경영기획실의 책상머리가 아닌 현장에서 살아 있는 전략을 도출하겠다는 의도다. 그는 “자동차 성능이 얼마나 진화했는지 몸으로 느끼고 싶다”며 최근 24시간 자동차 국제 레이스에 참가하기도 했다.도요타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글로벌 금융 위기와 엔고 등 외부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도요타는 고통의 해법을 철저히 내부 현장에서 찾고 있다. 도요타 자동차가 만만치 않은 이유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