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힘들고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 때마다 나는 아버지께 여쭤 보곤 했다. 당신의 답은 늘 같았다.“네가 알아서 해라.”아버지는 내 물음에 언제나 즉답을 주지 않으셨다. 하지만 언제나 아버지는 나에게 말없이 지혜를 주시는 스승이셨다.대학 진학 때 철학과를 가고 싶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배고파진다며 반대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그러하시듯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올바른 정답(正答)은 없다, 네가 정하는 답(定答)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네가 정하라”는 의미였다. 아버지는 절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강요하지 않으셨다.아버지는 그 대신 질문을 하셨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하고 말이다. 그 당시는 그게 너무도 답답했다. “몰라서 물어보는데 답을 주지 않고 나에게 거꾸로 물어보시면 어떡하란 말인가”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그러나 살아보니 아버지의 가르침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서 배울 때는 고정된 정답이 있고 객관식 답변을 하면 됐다. 하지만 실제 삶의 문제는 모두가 주관식이지 않은가. 삶이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다.아버지는 언제나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셨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사방(四方)이 흔들릴수록 중심(오방)을 잡아라”고 주장하는 오방의 원리도 아버지의 가르침이셨던 것 같다. 오방이란 다섯 번째 방위(五方)가 중심이며, 그 중심은 나(吾)이고, 그것을 깨닫는 것(悟)이란 뜻이다.아버지는 지금은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다. 내가 살던 경남 창녕군 대합면 대곡리 시골마을. 그곳에는 TV는 물론 전기도 없었다.하지만 아버지는 마당에 TV를 놓고 자동차 배터리로 연결해 동네 극장을 열었다. 시끄러워서 공부도, 잠자기도 힘들었다. 어머니는 쓸데없이 돈쓰고 애들 공부 방해한다며 당장 TV를 되팔라고 투정이셨다.하지만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문화 생활(?)’을 누리게 해 주신다며 강행하셨다. ‘아까징끼(머큐로크롬)’ 소화제 지사제 두통약 등의 구급약을 준비했다가 집안 사람과 동네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주셨다. 제라늄 선인장 등도 나눠주셨다.어머니는 아버지의 이러한 퍼 주기가 늘 불만이셨다. 아버지가 제자들의 어려운 상황을 고민하거나 성공을 자랑할 때마다 어머니는 “우리 애들은 어떻게 할 거냐?”고 불만을 터뜨리셨다. 나 역시 어릴 적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원망스러웠다.아버지는 가족들에게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해 주지 못한 점이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정년퇴임을 몇 달 앞두고 간암 선고를 받았다. 아버지는 병석에서 어머니께는 자개농을, 첫 손녀인 딸 반야에게는 피아노를, 손자에게는 교육보험 증서를 선물하셨다.그리고 나에겐 “미안하다, 네게 줄만한 것이 없구나”라면서 제자들로부터 퇴임 선물로 받은 굵은 금가락지를 주시며 눈물을 글썽이셨다.그 후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시면서 이 세상 떠날 준비를 하셨다. 중환자실에서 집으로 모실까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할까를 고민하다가 “아버지, 어디에 있고 싶으세요?”라고 여쭸더니, 힘없이 ‘定’을 쓰시다가 필을 놓으셨다. “네가 정(定)한 데로 해라”는 뜻일게다.“아버지, 당신의 손자 일붕이가 저에게 ‘아빠 어떡하면 좋아요?’라고 물어올 때 저도 아버지처럼 ‘네가 원하는 것이 뭐지’라고 되물어 보면 되겠지요?” 아버지 생전에 표현하지 못한 말을 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존경합니다.’ 1952년 태어나 74년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75년 한국경제신문에 입사했고 80년 동서식품 영업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88년 한국경제신문에 돌아왔다. 2003년부터 한경아카데미 원장을 지냈고 2008년 말부터 오방리더십연구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