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통신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해 3월.밤늦게 퇴근해 잠자리에 들려는 기자에게 청와대 기자실을 관할하는 춘추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일 이 대통령이 서울 시내의 모 재래시장을 방문할 예정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딱 한 줄 들어갔는데 그 부분을 좀 빼달라고 요청했다. 대통령 신변 안전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경호처가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청와대의 요구를 받은 기자는 “시간과 장소를 명기하지 않아 엠바고를 위반한 것도 아니다. ‘서울의 한 재래시장’이라고만 했는데 경호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이냐”고 버텼다.1년여가 지난 최근 경호 관계자에게 이 사실을 언급하며 “재래시장이 수백 군데여서 경호에 문제가 없을 텐데 왜 경호처가 그런 반응을 보였느냐”고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그는 “대통령이 외부 행사를 가질 땐 경호원들과 경찰들이 몇 주 전부터 그 장소에 가서 폭발물을 탐지하거나 대통령의 동선을 일일이 확인하는 등 경호 계획을 세운다”고 말했다. 이어 “시장 상인이나 손님들이 우리의 행동을 보고 대통령이 오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다가 신문에 대통령이 재래시장에 간다는 보도가 나면 ‘아, 그래서 저 사람들이 미리 와서 저 난리를 치는구나’라고 알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대통령 보호에 완벽을 기하려는 ‘충정’으로 이해됐다.사실 대통령 경호는 까다롭기 그지없다. 경호처는 대통령이 가는 현장을 사전에 가서 동선에 따라 세세한 계획을 세울 뿐만 아니라 필요할 경우 검색대를 설치하거나 폭발물 탐지견을 동원한다. 대통령이 움직일 때는 주변 지역도 ‘물샐틈없는’ 경호가 펼쳐진다. 그런데 번잡한 재래시장은 이런 식의 ‘철저한 경호’가 어렵다. 이 때문에 장소와 시간이 보도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재래시장에 간다는 것 자체가 알려지는데 대해 경호처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다.이래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래시장 가는 것을 꺼렸다. 반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서울 남대문시장을 가고 싶어 했다. 경호팀과 경찰이 극구 말렸다. 한 참모는 “우리가 세게 밀어붙였지만 경호팀과 경찰이 ‘우린 책임질 수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의 시장 방문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지난해 서울 봉천동을 비롯해 재래시장 몇 군데를 들렀다. 이 대통령은 가게 주인에게 이끌려 정해진 동선에서 이탈하기 일쑤였다. 또 시장을 돌던 중 불쑥 호박떡과 어묵을 사서 주변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 경호 수칙상 대통령이 외부에서 먹는 음식은 검식 과정을 거치게 돼 있는데, 이럴 경우 어쩔 수 없다. 주변 상인들이 들이대는 휴대전화 카메라 앞에서 손으로 ‘V자’를 그리며 포즈를 취하느라 자주 멈추기도 해 경호팀의 가슴을 졸이게 했다.청와대 경호원들은 ‘매일 죽는 연습’을 하는 사람들이다. 2000년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을 수행했던 경호원들은 ‘대통령이 위험에 처하면 단 한 명도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았다. 한 경호관은 “집을 나설 때 ‘다녀올게’가 아니라 ‘나 갈게’라고 인사하고, 가끔은 유언 비슷한 당부의 글을 남몰래 남기기도 한다”며 비장함을 나타냈다. 한 여성 경호관은 “국립묘지에 가서 순직한 선배 경호관들의 묘소 옆에 있는 빈 묏자리를 보면서 ‘다음에는 내가 여기 묻힐 수 있는 영광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각오를 다졌다”고 말하기도 했다.이 대통령은 지난해 경호 시범을 본 후 “경호관들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직무에 임하는지 새삼 깨닫게 됐다. 내가 (이 시범을) 일찍 봤더라면 경호관들이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했을 텐데…. 앞으로 경호관 말을 잘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해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노 전 대통령도 2003년 5월 경호 시범을 참관한 후 “한편으로는 으스스하고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그해 7월엔 “제가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경호실 사람”이라고 농담조로 말했다. 그런데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노 전 대통령을 보호하는데 실패했다. 경호에 큰 오점을 남긴 것이다.홍영식·한국경제 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