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지표만 보면 일본은 기업가 정신이 침체된 나라다. 일본의 창업 활동 지표는 미국 캐나다 영국 등 다른 선진국 수준에 턱없이 못 미친다. 하지만 일본은 가업 승계가 활발해 창업률이 구조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이런 ‘통계의 착시’를 걷어내면 비로소 일본을 움직이는 기업가 정신의 진면목이 눈에 들어온다. 오사카의 ‘동네 공장’들은 대기업도 어렵다는 인공위성 제작에 뛰어들어 성공시켰다. 교토 지역의 중소기업들은 개성 넘치는 친환경 전기차 ‘교토카’를 개발하고 있다.지난 1월 23일 일본 규슈 가고시마에 있는 다네가시마우주센터에선 인공위성 ‘마이도 1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이 광경을 발사장 옆 관람석에서 지켜보던 머리가 허연 중년 신사는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지난 6년간의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을 눈으로 확인한 기쁨의 눈물이었다. 이 중년 신사는 오사카에 있는 기계 부품 중소기업인 아오키의 아오키 도요히코(62) 사장. 마이도 1호를 손수 만들어낸 주역이다.아오키 사장이 인공위성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건 2002년 12월이다. 일본 경제의 거품 붕괴로 오사카에 밀집해 있는 중소기업들이 불황에 빠지고 기술자들이 한둘씩 떠나가자 ‘어려울 때일수록 꿈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인공위성 제작을 구상했다. 특히 불황에 허덕이는 오사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미래의 희망을 잃은 일본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싶었다.‘칫솔에서 로켓 개발까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뜻을 같이하는 중소기업인들을 모았다. 산케이제작소 니신 다이니치전기 등 인근의 11개 중소기업 사장들이 적극 호응해 인공위성 제작을 위한 컨소시엄을 만들었다. 오사카의 ‘동네 공장(마치코바)’들이 모여 인공위성을 만든다고 할 때 모두가 비웃었다. 개발비만 수십억 엔이 들고, 5년 이상 시간이 필요한 인공위성을 영세 중소기업들이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그러나 이들은 결국 해냈다. 아오키 사장은 구름 관측위성인 마이도 1호의 발전형 모델인 ‘마이도 2호’도 만들어 쏘아 올릴 계획이다. 아오키 사장은 “지금은 구름 관측위성이지만 앞으로는 범용성이 높은 위성을 개발해 일본 중소기업의 힘을 세계에서 인정받고 싶다”며 “특히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위성 기술에 계속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일본은 ‘기업가 정신’과 거리가 먼 나라로 알려져 있다. 도요타자동차 파나소닉 등 세계적 기업들이 수두룩하지만 기업가 정신의 바로미터인 기업 창업이 활발하지 않고 벤처기업 성공률도 낮기 때문이다.실제 2004~06년 중 일본에서의 창업률은 5.1%로 폐업률 6.2%를 밑돌았다. 새로 창업한 기업보다 문 닫은 기업이 더 많았다는 얘기다. 또 세계 기업가 정신 모니터(GEM)란 기관이 조사한 주요국의 창업 활동률을 비교해 보면 일본은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히 낮다. 일본의 창업 활동률은 2.2%로 미국(12.4%) 캐나다(9.3%) 영국(6.2%) 독일(5.4%) 프랑스(5.4%) 수준에 턱없이 못 미친다. 창업 활동률은 창업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과 창업 후 42개월 미만인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의 수가 18~64세 인구 100명당 몇 명인지 보여주는 지표다.그러나 이런 지표만 보고 일본엔 ‘기업가 정신’이 없다고 단정해선 안 된다. 특히 일본의 경우 창업률 등 지표만 갖고 기업가 정신의 여부를 판단해선 곤란하다. 일본은 가업 승계가 다른 그 어느 나라보다 활발하다. 이 때문에 지표상 창업률은 구조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하지 않고 무조건 서구 기업의 잣대로만 재단해선 ‘통계적 착시’에 빠질 수 있다.일본 기업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인공위성을 만든 오사카의 아오키와 같이 기업가 정신이 넘치는 기업이 많다. 일본에서 기업가 정신의 상징으로 불리는 교토의 기업들을 보면 특히 그렇다.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이란 장기 침체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교토 지역의 기업들은 불굴의 기업가 정신으로 발군의 성과를 냈다. 교세라 무라타제작소 옴론 호리바제작소 일본전산 등이 그런 기업들이다. 이들의 기업가 정신은 ‘교토식 경영’이란 이름으로 경영학 교과서에까지 나온다.실제 이들 기업은 일본 내 다른 지역의 기업들이 제자리걸음했던 1990년대 이후 2000년대에 걸쳐 10년간 매출이 배로 늘어났다. 2001년 정보기술(IT) 거품 붕괴로 마쓰시타전기(현재 파나소닉) 등이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을 때도 교토 기업의 이익률은 3.4%에 달했다. 교토 기업의 총자산이익률(ROA: return on assets)은 1992년 2.4%에서 2004년 3.9%로 늘어났다. 다른 지역 전자 업체는 같은 기간 1.1%에서 0.8%로 오히려 후퇴한 것과 대조적이다.그렇다면 교토식 경영의 핵심은 무엇일까. 교토의 기업인들은 ‘시장(Market)이 없는 곳에서 성장한 것이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역설적이지만 척박한 환경이 교토 기업들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는 얘기다. 사실 교토에는 도요타자동차나 파나소닉과 같은 대규모 완제품 제조업체가 없다. 일본의 전통적 기업 간 거래 방식인 ‘계열’에 속한 기업도 없다. 이 때문에 창업 때부터 해외시장을 개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배경이 그들의 기술 경쟁력을 높였다는 설명이다.반도체 부품 제조 장치 사업에 특화하고 있는 삼코(SAMCO)인터내셔널의 쓰지타케 오사무 지사장은 “시장적 제약이야말로 교토 기업들의 기업가 정신에 불을 붙였다”고 말했다. 교토 기업들이 열린 수평적 분업 구조와 특화 기술을 지향해 세계 그 어느 기업과도 활발하게 거래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상할 정도의 엉뚱함’과 ‘자기 것에 대한 자부심과 고집’도 교토 기업 특유의 기업가 정신의 밑거름이기도 하다.교토에서 일명 ‘교토카(Kyoto Car)’라는 전기차가 개발되고 있는 것도 교토 지역의 ‘기업가 정신’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교토에선 지금 교토대와 지역 벤처기업들이 의기투합해 교토카를 개발 중이다. ‘차체는 철판이 아닌 대나무, 연료는 태양광전기, 외장엔 벚꽃 디자인이 그려진 자동차’가 교토카의 콘셉트다. 만화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런 전기자동차가 실제 교토에서 개발되고 있다.환경 친화적 첨단 기술과 문화를 접목하는 게 특징인 교토카는 철저히 환경 친화형 자동차를 지향한다. 이 때문에 차체에 철판을 사용하지 않는다. 연료도 태양광을 이용한다. 이산화탄소 배출 억제를 위한 국제 협약인 ‘교토의정서’가 맺어졌던 도시로서 환경 친화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교토카엔 12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교토의 전통 문화도 반영된다. 자동차 차체엔 밋밋한 단색 외장 대신 꽃무늬 등 일본의 전통 문양이 디자인될 예정이다. 첨단 환경 자동차에 문화를 담겠다는 포부다. 2010년 개발을 완료한다는 계획이다.이 교토카 프로젝트를 처음 제안한 사람은 일본의 명문 국립대인 교토대의 벤처비즈니스랩(VBL) 마쓰시게 가즈미 부학장이다. 마쓰시게 부학장 뒤엔 교토 지역의 혁신적인 벤처기업들이 포진해 있다. 마쓰시게 부학장은 벤처기업 8곳과 교토카 개발 컨소시엄을 구성한 상태다.철판을 쓰지 않고 대나무 소재와 탄소섬유를 사용할 차체 개발엔 이 지역 최고의 나노기술 벤처기업이 참여했다. 전기자동차의 핵심인 태양광전지와 연료전지 등도 지역 벤처기업이 직접 개발하고 있다. 교세라(정보통신기기) 옴론(전자부품) 덴소(자동차 부품) 등 일본 최고 부품 기업들의 고향인 교토의 기술력이 교토카에 집약되는 셈이다.일본 곳곳에 기업가 정신이 충만한 기업이 많은 데는 정부의 정책적 노력이 기여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일본 정부는 기업 우선 정책을 통해 기업 환경을 개선하는데 세계 그 어느 나라 정부보다 열성이다. 또 ‘기업가 정신’을 더욱 북돋기 위해서도 다각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경제의 성장 동력 확충이란 측면에서 기업가 정신 육성을 중요한 정책 과제로 설정하고 1999년부터 초·중·고·대학 등 교육기관을 통해 기업가 정신 육성 교육을 강화해 오고 있다.그중 하나가 경제산업성이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기업가 교육이다. 경산성은 기업가가 갖춰야 할 마인드 중 도전정신 창조성 등은 사람의 가치관이나 행동 양식과 관련된 만큼 일찍부터 교육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이에 따라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경력 개발 경로(Career path) 교육을 실시하도록 학습 지도 요령에 명기했다. 경력 개발 경로 교육이란 학생 개개인의 능력이나 적성을 고려해 장래에 목표를 갖고 일할 수 있도록 직업의식을 가르치는 교육이다. 그 결과 2006년 공립중학교의 직장 체험 실시율은 94.1%, 공립고등학교의 인턴십 실시율은 62.0%에 달한다.또 초·중·고교 교육용으로 기업가 교육 교재와 교육 프로그램 개발, 교원 매뉴얼 개발 사업, 벤처기업 경영자 등의 학교 파견, 교사의 벤처기업 연수 사업 등도 벌이고 있다. 기업가 교육에 공헌한 단체나 학교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표창도 한다.대학과 대학원에서도 기업가 교육은 이어진다. 쓰쿠바대학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 700개 대학중 약 40%인 281개 대학이 기업가 교육 과목을 신설해 운영하고 있다. 다이와종합연구소가 와세다대학 등 22개 대학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기업가 정신 관련 강좌 개설 수는 2005년 71개에서 2006년 131개, 2007년 151개로 늘어나는 추세다.이 같은 교육 지원으로 인해 대학에서 창업한 벤처기업 수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1988년 39개사에 불과했던 대학발(發) 벤처기업은 1998년 203개사, 2001년 598개사, 2006년 1590개사로 증가했다.벤처기업 지원을 위한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창업 초기 기업에 대한 자금 공급원(엔젤) 확충 제도가 대표적이다. 일본은 벤처기업의 창업과 성장 과정에서 엔젤 투자자가 차지하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고, 엔젤 투자에 각종 세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예컨대 회사 설립 3년 이내의 기업으로서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벤처기업에 엔젤 투자를 하는 경우 엔젤 투자액을 총소득에서 공제할 수 있는 ‘엔젤투자소득공제제도’를 시행 중이다.또 기업가 정신이 발현될 수 있는 인프라 구축 차원에서 창업보육사업(Business Incubator)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창업보육사업은 1999년 신사업창출촉진법 시행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1999년 30곳에 불과했던 창업보육센터가 신사업창출촉진법 제정 이후 급속한 늘어나 2007년 말 현재 보육센터 수가 190곳에 달한다.창업 촉진을 위한 규제 완화도 빼놓을 수 없는 기업가 정신 지원 인프라다. 일본 정부는 창업 활성화를 위해 최저자본금제도(종전 1000만 엔)를 폐지해 1엔짜리 주식회사도 설립이 가능하도록 했다. 창업 설립 절차도 간소화하고 유한책임회사(LLC) 유한책임조합(LLP) 등 회사 형태를 다양화함으로써 창업자의 선택의 폭도 넓혔다.일본 정부는 기업가 정신 함양을 위해 다양한 이벤트 사업도 펼치고 있다. 기업가 정신 함양과 벤처 창업 촉진을 위해 창업·벤처국민포럼, 벤처플라자, 벤처박람회저팬(JAPAN) 등이 그런 것들이다. 창업·벤처국민포럼은 창업 경험자와 학자 등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이 모여 기업가 정신의 발휘와 고양을 위한 사업을 전개하는 공식 조직이다. 이 포럼은 매년 기업가 정신 함양과 벤처기업 육성 등을 위한 세미나와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벤처박람회와 우수 벤처 시상식도 연다.벤처기업이 투자자나 사업 파트너에 대해 사업계획서를 설명하는 ‘벤처플라자’ 사업도 정부가 주최한다. 벤처플라자 사업은 사업 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자금이나 사업 제휴 등 경영 자원의 원활한 조달을 지원하기 위해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에서 1년에 6번 정도 개최한다.일본의 대표적 경제단체인 게이단렌 관계자는 “경제발전을 맨 앞에서 이끄는 주체는 누가 뭐래도 기업”이라며 “기업가 정신이야말로 나라 경제를 부강하게 만드는 비타민과 같은 영양소”라고 말했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