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영 삼성경제연구소장
삼성경제연구소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싱크탱크다. 삼성그룹의 경제연구소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그동안 한국 사회의 의제 설정을 주도해 왔다. 2000년대 초반 ‘강소국론’을 비롯해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 ‘동북아 금융 허브’, ‘혁신 클러스트’ 등 귀에 익은 국가적 아젠다 중 상당수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잉태된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는 환율과 유가 전망은 물론 히트 상품과 농업, 문화 산업까지 포괄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다못해 ‘휴가 때 CEO가 읽어야 할 책’까지 큰 화제를 모을 정도다. 이런 독보적 위상은 지난해 말 한경비즈니스가 전문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대한민국 100대 싱크탱크’ 조사에서 처음 구체적인 수치로 확인됐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매머드급 정부 출연 연구소들을 밀어내고 압도적 차이로 경제·산업 분야 1위에 올랐다.정기영(55) 소장은 연구소의 성공 요인으로 ‘현장 밀착형 연구’를 꼽았다. 이론적 연구에서 벗어나 현장 기업과 정책 결정자 등 각 경제 주체에 ‘어필’할 수 있는 연구에 주력해 왔다는 설명이다. 정 소장은 “정보의 비대칭성이 사라지면서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며 “삼성경제연구소에는 새로운 도전이자 또 다른 성장의 기회”라고 말했다. 그는 더욱 차별화된 ‘명품 연구’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정 소장은 한국금융연구원을 거쳐 삼성생명 금융연구소장을 지낸 국제금융 전문가다. 지난 1월 삼성경제연구소 소장에 부임해 그동안 내부 정비에 주력해 왔다. 가장 먼저 경기 회복 전망을 화제에 올렸다.일부 희망적인 조짐이 나타나고 있지만, 대내외 경제 환경이 조기에 뚜렷하게 개선되기는 힘들 것으로 봅니다. 미국의 고용 악화와 기업 실적 부진, 가계 부채 증가 등이 거꾸로 금융 부실로 다시 번질 가능성이 있지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이에요. 국내 금융 불안도 어느 정도 완화되겠지만 글로벌 금융 불안이라는 잠재 요인이 그대로 있는 한 역시 명쾌하게 해소되기는 어려워요. 지나친 비관론이 해로운 것만큼 섣부른 낙관론도 경계해야 할 시점이지요. 굳이 예상한다면 상반기 말쯤 저점을 통과하지만 회복세는 매우 더디게 나타나 실제로 올해 안에는 경기 회복을 체감하기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변화를 말하기는 무리가 있다고 봐요. 1990년대 말 미국의 금융 규제가 대폭 완화됐는데, 이때 변화된 금융 체계에 맞는 새로운 감독·관리 시스템이 함께 발전했어야 해요. 이런 부분을 소홀하게 한 것이 지금의 문제를 부른 겁니다. 즉, 경제 시스템의 발전과 이에 필요한 관리 체제의 발전 사이에 지체 현상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지요. 신자유주의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식의 필연론은 과도한 논리적 비약이라고 생각해요.경제 시스템의 안정성을 위해 금융 리스크와 외환 리스크를 안정화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와 이번 금융 위기는 모두 은행권의 단기 외채가 불안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외환시장의 불안정성을 완화할 수 있는 외환 관리 시스템을 재건하는 것이 급선무예요. 달러 위주인 외환시장을 유로와 엔, 위안으로 다변화하고 외화보유액만이 아니라 국가 간 공조를 통해 외화 유동성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삼성경제연구소의 최대 강점은 철저하게 경제 주체의 현장에 밀착해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아탑의 이론적 연구를 통한 우회 생산보다는, 현장의 기업과 정책 결정자 등 경제 주체에 밀착해 이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기는 현장 연구에 몰입하고 있지요. 이러한 현장·실무형 연구 전통은 해외 유명 대학 출신 박사들을 주로 채용하는 요즘에도 연구소의 조직 문화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어요. 이론 지향적인 연구를 통해 학계에 어필하기보다 실제 현장에 있는 각 경제 주체에게 어필한다는 마인드는 삼성경제연구소만의 강점입니다. 또한 다른 연구기관들은 연구자 개개인을 단위로 한 독립형 연구를 선호하지만 삼성경제연구소는 철저하게 팀 단위 공동 연구를 하고 있어요. 다양한 분야의 인력이 경계를 넘어 하나의 주제를 놓고 긴밀하게 토론하고 협력하는 학제 간 연구도 활발해요. 팀 단위 연구는 보다 규모가 큰 연구를 이른 시간 내에 질 높게 수행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어요.대기업 연구소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일정 부분 제약을 받고, 또 이것이 연구의 객관성과 권위를 인정받는데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우려를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런 제약으로부터 100% 자유로운 연구기관은 대학 말고는 없고, 대학조차 실제로는 이런 제약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하기 어렵지요. 대기업 연구소라는 것을 굳이 제약으로만 여길 필요는 없다고 봐요. 오히려 연구소의 분명한 가치관이나 특색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방향성 아래 최대한 객관적이고 근거 있는 연구를 해 나가면 보다 더 분명한 메시지를 사회에 전달할 수 있다고 봅니다.1986년 설립돼 이제는 삼성그룹의 싱크탱크 차원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민간 싱크탱크로 자리 잡게 됐어요. 앞으로 과제는 국내 오피니언 리더는 물론 글로벌 오피니언 리더들에게도 한국 경제와 기업에 대해 보다 정확하고 시기적절한 연구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겁니다. 이를 위해 보다 신속하고 현장감 있고, 그대로 적용 가능한 대안 제시형 연구를 더 활발하게 수행해야 해요. 정보의 비대칭성이 사라지면서 나타난 현상 중 하나는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는 거예요. 이는 삼성경제연구소가 직면한 새로운 도전이자 또 다른 성장의 기회라고 생각해요. 차별화된 연구만이 삼성경제연구소가 누리고 있는 브랜드 이미지를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저는 이것을 ‘명품 연구’라고 말하지요. 쉽게 모방할 수 없는 연구 테마와 연구 방법을 통해 삼성경제연구소에서만 제공받을 수 있는 보고서를 만들어 내는데 초점을 두고 있어요.개인적으로 특별히 강조하는 분야는 없습니다. 다만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분야와 중·장기적으로 봐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분야를 균형감 있게 다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현실을 무시한 연구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연구는 모두 문제가 있다고 봐요. 연구를 직접 수행하는 접근법과 관련해서는 연구원들이 좀 더 ‘고객 지향적인’ 연구 결과물을 만들도록 계속 동기를 부여하고 있지요. 동일한 패턴이나 단순히 쓰기 위한 보고서는 연구소의 고객인 정책 입안자나 기업 경영자들에게 쉽게 읽힐 수 없어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보고서를 읽을 사람의 눈높이와 기대를 항상 염두에 두는 연구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어요.연구원들의 전공 분야를 보면 경제연구소라고 하기엔 너무나 다양합니다. 공학도도 있고, 심리학 전공자, 물리학을 공부한 경우도 있어요. 미래의 경제 상황과 기업 경영의 변화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공과 백그라운드를 가진 인재들이 더 많이 필요해요. 저는 연구원들에게 ‘강호의 고수’가 되라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자신의 실력을 알리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연구 결과를 검증 받고, 이를 통해 더 발전해 나가야 해요. 또한 대부분의 연구가 팀워크로 이뤄지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 같은 인간미도 중요해요. 연구에 대해서는 서로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지만 방향이 결정되고 나면 자신이 맡은 부분을 철저하게 책임질 수 있어야 합니다.1954년 경남 마산 출생. 76년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81년 미 위스콘신대 경영학 석사. 86년 미 UC버클리대 국제금융 박사. 88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 92년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실 파견. 94년 재정경제원 금융산업발전심의위원회 위원. 96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회 위원장. 97년 삼성생명 금융연구소장. 2007년 삼성생명 경영전략실장. 2007년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조정실장. 2009년 삼성경제연구소 소장(현).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