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지난해는 프라이빗 뱅커(PB)들에게 ‘수난시대’였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실물경제로 번지며 경제 여건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불황에 강하다고 하는 부자들이지만 위기는 그들을 비켜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수익률 급락과 고객들의 불만, 투자 상품의 부재라는 삼중고에 PB들은 신음했다.이에 따라 PB들의 사기도 크게 떨어졌던 게 사실이다. 큰 투자 손실로 고객들의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던 PB 중 일부는 일반 점포로 이동을 희망하기도 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고참급 PB 중 일부가 일반 점포로 옮기고 싶다는 이야기도 자주 했다”며 “어떤 PB는 거액의 손실을 본 고객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며 압박해 한 달 새 체중이 7kg이나 빠졌다”고 안타까워했다.하지만 오히려 이번 금융 위기를 통해 자산관리 업무라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계기로 삼고 있는 PB들이 많아지고 있다. 사실 그동안 소수 부유 고객을 대상으로 거액을 움직여 온 PB센터는 건전한 자산관리보다는 화려한 인테리어와 다양한 고객 서비스로 승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고비용 저수익’의 함정에 빠진 사례도 자주 보였다. 하지만 이번 금융 위기를 통해 이 같은 거품을 빼고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실제로 삼성증권 PB연구소가 내놓은 ‘2009 해외 PB 비즈니스 7대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자산관리 시장은 인수·합병(M&A)과 구조조정, 인력 감원 등 소용돌이 속에서 ‘기본으로 돌아가는(Back to the basic)’ 전략이 가장 큰 흐름을 보이고 있다.현재 해외에서 자산관리업을 하는 금융회사들 가운데 JP모건체이스가 베어스턴스를, 뱅크오브아메리카가 메릴린치를, 웰스파고가 와코비아를 각각 인수한 데 이어 모건스탠리와 BNP파리바도 M&A를 통한 경쟁력 강화를 모색 중이다.이런 와중에서 눈에 띄는 트렌드는 바로 우수한 투자은행(IB) 인력이 프라이빗 뱅킹(PB) 업계로 편입되고 있는 현상이다. 사실 금융회사 PB 영업의 승패는 경쟁력 있는 전문 PB의 확보가 좌우한다. IB 인력들의 경우 PB 영업에 있어 매우 중요한 타깃 고객인 기업가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PB에 비해 경쟁력이 있다. 또 PB 고객들의 부의 원천이 전통적인 ‘상속’에서 ‘비즈니스’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도 기업인들과 친숙한 IB 인력의 주가를 높이고 있다.보고서에 따르면 부자 고객들은 고수익·고위험인 구조화 상품보다 현금이나 채권 등 기본적이면서 전통적인 상품으로 돌아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장기간의 트랙 레코드(track record: 실적) 축적으로 성과가 검증됐거나 상품 구조에 대해 이해가 쉬운 상품들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 때문에 PB들은 복잡한 투자 상품의 개발을 당분간 자제하고 투자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단순한 구조의 상품들을 내놓고 있다.이와 함께 PB들은 상담 서비스에 보다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즉, PB가 단순히 상품을 판매하는 ‘세일즈맨’이 아니라 고객과의 장기적인 관계를 염두에 두고 고품질의 자문을 제공하는 ‘어드바이저’로서의 역할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또 최근 PB들은 적극적인 영업 확대보다 기존 고객의 이탈 방지 등 내실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실제로 해외 기관의 조사 결과 응답자의 3분의 2가량이 금융 위기 이후 새로운 PB로 교체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그 이유로 ‘서비스에 대한 불만족’이 87%로 ‘투자 성과에 대한 불만족’ 13%보다 훨씬 크게 나타남에 따라 PB들은 상담 등을 통한 고객 관리를 강화해 부자 고객들의 이탈을 막는데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이와 함께 PB들은 고객들에게 분산 투자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더욱 커지고 있어 철저한 분산 투자를 통해 위험을 줄이고 안정 속에서 수익률을 올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장지영 삼성증권 PB연구소 수석연구원은 “PB비즈니스가 M&A와 구조조정 등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겠지만 거래 회사를 옮기려는 투자자들이 많아 ‘기본으로 돌아가는’ 전략 속에 기회를 포착한 회사가 반사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실제로 최근 국내서 머니마켓펀드(MMF) 등 단기 자금 위주로 꾸려지던 부자들의 포트폴리오가 주가 상승과 함께 증시로 이동하는 ‘머니 무브’ 현상이 감지되면서 각 금융사들은 PB 영업을 재정비하고 있는 추세다.KB금융그룹은 계열사 간에 분리된 고객 정보와 마케팅 분석 기능을 통합해 우대 고객(VIP) 제도를 ‘그룹 통합 로열티 프로그램’으로 합친다. 이를 통해 VIP 고객에 대한 캠페인 영업을 강화하고 다양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고객 맞춤형 복합 상품’을 내놓을 예정이다.특히 KB금융그룹은 국민은행 영업점을 기반으로 교차 판매, 소개 공동 영업, 복합 상품 판매가 가능한 ‘복합 점포’를 개설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KB투자증권은 상반기 국민은행 PB센터 내 BIB(Branch in Branch) 형태로 PB 전문 인력을 상주시켜 PB 관련 주식이나 투자 상담 서비스를 확대할 방침이다.하나은행은 PB 고객에게 맞는 소규모 투자 세미나를 더욱 활성화하고 직원 역량 강화에 나섰다. 금융자산 5억 원 이상은 골드클럽, 10억 원 이상 고액 자산가는 WM (Wealth Management)센터로 분류해 WM센터에서는 하나대투증권의 자산관리부문 서비스를 통합 제공하고 있다. 또 우리은행은 영업점과 PB센터를 활용해 총 340지점에서 PB 고객 서비스를 확대할 예정이다.기업은행은 오는 7월 자체 PB센터 브랜드인 ‘윈 클래스’를 론칭해 올해까지 분당 강남(2곳), 강북(1곳) 등 4곳에 PB 전용 센터를 만들 방침이다. 또 기존 PB 고객 기준을 5000만 원에서 1억 원으로 높일 예정이다. 1억 원 미만 고객에 대해선 FA(Financial Advisor)가 관리하게 된다.해외 부동산 투자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외환은행도 10개 내외의 PB 전용 점포인 WM센터를 통해 경쟁력을 높일 계획이다. 얼마 전 취임한 래리 클레인 신임 외환은행장은 향후 PB 분야의 강화에 힘쓸 것이라고 밝힌 바 있어 외환은행 PB 서비스는 보다 강화될 전망이다.SC제일은행은 여성 PB 고객을 위한 전용 뱅킹센터를 서울 강남 도곡동에 오픈했다. 은행 거래에 필요한 모든 시설은 기본이고 화장을 고칠 수 있는 전용 파우더룸과 뷰티 랩, 골프 퍼팅 연습장 등 다양한 여성 편의시설을 갖췄다. 여성들은 이곳에서 자산관리는 물론 부동산, 세무, 진학 정보, 유학 세미나 등을 받을 수 있다.은행 측은 “커스터머 퍼스트(Customer First) 전략의 일환으로 고객군을 세분화하고 맞춤형 서비스의 차원에서 여성 전용 PB센터를 오픈하게 됐다”며 “여성을 위한 공간이란 점에서 세세한 것까지 신경을 썼다”고 설명했다.증권사 역시 은행과 차별화된 서비스로 PB 서비스에 드라이브를 걸 예정이다. 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됨에 따라 증권사 PB들이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 증권사 PB에겐 가장 큰 호재다. 특히 최근 부자들 사이에서 회사채 투자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면서 증권사 PB들에게 상담이 몰리고 있는 분위기다.이에 따라 우리투자증권은 기존 PB를 시니어, 마스터, 기본 PB 등 3단계로 세분화해 스타급 PB 만들기에 나섰다. 또 그동안 온라인 위주의 영업을 해 왔던 이트레이드증권은 4월 초 서울 선릉역 인근에 첫 오프라인 영업점인 ‘테헤란 PB센터’를 오픈하기도 했다. 이트레이드증권은 앞으로 오프라인 영업점을 PB센터 형태로 거점 지역에 점진적으로 설립해 나갈 예정이다.이홍표 기자 hawlli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