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 필자는 지금 런던에 있다. 한 국내 기업의 의뢰를 받아 굴지의 다국적기업이 제시한 손해배상 소송을 최소한의 비용으로 원만히 해결하기 위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다행히 협상은 당초 기대를 약간 웃도는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기대가 든다.내 직업은 국제 비즈니스 협상 컨설턴트다. 여러 기업과 학교를 오가며 쌓은 이론과 훈련이 지금을 만든 배경이다. 그러나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경력 외에 오늘을 있게 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바로 11년 전 1998년 초여름, 늦깎이 경영학석사(MBA)로 미국으로 가기 얼마 전 예순 여덟의 일기로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다.여기까지 보면 유복한 가정에서, 그리고 소위 그럭저럭 잘나가는 아버지 덕택에 별 어려움 없이 지내온 부잣집 아들 얘기처럼 생각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사실은 많이 다르다. 선친은 중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이다.철도 공무원으로 평생 일하면서 타고난 성실과 청렴함으로 여러 차례 크고 작은 훈장과 포장을 받고 정년퇴임한 할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에게 별다른 재산을 물려주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한마디로 돈도, 내세울 만한 학벌도 없는 분이셨다.더욱이 생전에 어머니가 들려주신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종합해 보면 당신께서는 사실 돈과는 그다지 인연도 없는 분이셨던 것 같다. 당신의 당숙이 운영했던 섬유 회사에서 근무하시긴 하셨지만 월급을 고스란히 어머니께 갖다 준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어릴 적의 어렴풋한 기억에도 집안 살림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당신의 거듭되는 한량 놀음에 어머니께서 무던히도 속상해 하시던 모습만 떠오른다.결국 어머니는 당신의 3녀2남 다섯 자녀를 먹이고 교육시키기 위해 아버지 회사 인근에 조그만 식당을 차리셨다. 그때 시작한 식당을 막내인 내가 회사에 입사한 지 딱 1년이 되자마자 여한 없이 그만두시는 걸 보면 참 지긋지긋하셨나 보다.또 착하고 공부 잘하는 누나나 형과 달리 놀기만 좋아하고 말썽꾸러기 개구쟁이였던 당신의 막내아들에겐 늘 “너를 개망나니가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며 매질을 아끼지 않으셨다.결국 아버지는 이런저런 모습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뼛속 깊은 원망과 반발, 그리고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성년이 되고 나서도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뿌리 깊은 콤플렉스를 필자에게 남겨 주셨다.이젠 나도 선친과 마찬가지로 다섯 자녀의 아버지가 되었다. 막내는 다가오는 6월에 첫돌을 맞는다. 녀석을 보면서 아버지를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나 스스로도 깜짝 놀라곤 한다.그런데 요즘 들어 뼈저리게 느끼는 건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마음속의 열등감이 결국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하도록 했고, 좌절은 감당할 수 없는 사치라는 것을 뼛속 깊이 새기며 오늘의 나를 만들어 오게 했던 원동력이 됐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이제야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생전에 당신 뜻대로 풀리지 않고 꼬여가기만 했던 인생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당신이 느끼는 세상의 무게는 얼마나 버거우셨을까. 자식들에게 번듯하게 내세울 것 하나 없다고, 오히려 평생 거추장스러운 짐만 되었다고 자책했을 당신의 속은 얼마 쓰라리셨을까. 말기 암 선고를 받으셨지만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자그만 문간방으로 당신 스스로 물러가신 후 곡기를 줄이며 죽음을 재촉하셨던 당신을 그때는 정말 이해하지 못했다. 한동안 더 버티실 것이라고 추측하며 서울로 돌아오기 전 부산 본가 목욕탕에서 당신의 앙상한 몸을 씻겨 드린 것이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의 알몸으로 이생에서 마주 대한 마지막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어려서부터 툭하면 내 발을 어루만져 주던 아버지. 원망도 많이 했지만 어른이 된 후에도 한 번씩 내 발을 말없이 꼭 잡아 보시던 아버지의 그 손길이 오늘따라 너무도 그립다. 그리고 너무도 죄송하다.박상기·글로벌협상컨설팅 대표1966년생이다. 91년 부산외대를 졸업한 후 같은 해 현대모비스에 입사했다. 2000년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 MBA에서 협상전략을 배운 후 삼성SDI에 글로벌 마케팅 과장으로 입사했다. 이후 자신의 경험과 전공을 살려 2002년 세운 글로벌협상컨설팅의 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