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처럼 경영하라 ⑨ - 최고의 인재를 등용하라
1490년, 이제 열다섯 살 된 소년 미켈란젤로는 두 번째 아버지를 얻게 되었다. 여러모로 한심했던 원래 아버지 로도비코 부로나오티가 첫 번째였다면 ‘위대한’ 로렌초 데 메디치가 이 천재 소년의 두 번째 아버지다. 미켈란젤로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재능 있고 실력 있는 인재를 널리 등용했던 메디치 가문의 특출한 관심과 지원 때문에 미켈란젤로가 탄생했다.15세기 후반, 메디치 가문의 영광이 정점에 달할 즈음에 피렌체를 통치했던 ‘위대한’ 로렌초는 우연히 산 마르코 수도원 근처에 있는 ‘메디치 정원’을 산책하다가 그곳에서 조각 연습을 하던 한 소년을 만난다. 당시 로렌초는 고대 조각이 가득한 자신의 정원을 피렌체 예술 지망생들에게 개방해 마음껏 조각 수련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그날, 소년 미켈란젤로는 고대 목신의 두상을 조각하고 있었다. 늙은 목신의 모습치고는 가지런히 뻗은 치아가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로렌초는 천재 소년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보았지만 서두르지 않고 말했다. “늙은 목신의 이빨치고는 너무 가지런하지 않니?” 그렇게 소년에게 미소를 던지고 조각 공원을 떠났다.미켈란젤로는 ‘위대한’ 로렌초 대공의 지적에 심기일전해 다시 조각칼을 집어 든다. 가지런하던 이빨을 뽑아내고, 잇몸까지 영락없는 노인의 것으로 다시 조각했다. 다음 날, 같은 장소를 산책하던 로렌초는 소년이 조각해 놓은 늙은 목신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로렌초는 즉각 소년의 행방을 수소문했고 생부인 로도비코의 동의를 얻어 자신의 양자로 입양한다. 미켈란젤로는 1490년부터 1492년까지 로렌초의 자녀들이 함께 살고 있던 웅장한 저택에서 생활하며 당대 최고의 석학들로부터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배운다.로렌초는 장차 르네상스 최고의 거장으로 성장할 15세 소년에게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 안젤로 폴리치아노, 그리고 피코 델라 미란돌라에게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들은 최고 인재를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혜안과 누구든지 재능이 있으면 곁에 두고 쓰는 탁월한 용병술을 가지고 있었다.탁월한 재능을 가진 최고의 인재를 발굴하고 후원하는 것은 메디치 가문의 전통이었다. 그 인재의 능력이 최고 수준이라면 분야도, 출신도, 과거도 중요하지 않았다. 능력이 최고라면 모든 것이 받아들여졌다. 메디치 가문의 문은 재능을 가진 이들에게 언제나 활짝 열려 있었다.겨우 열다섯 난 천재 소년의 재능을 첫눈에 알아보고 조금도 주저함 없이 그를 양자로 받아들였던 메디치 가문의 전통은 100년이 훨씬 넘도록 이어졌다. 오늘 소개할 메디치 가문의 인재 등용의 사례는 한 세기를 건너 17세기 초반에 일어난 일이다. 때는 1611년 5월 9일, 장소는 오라치오 젠틸레스키라는 화가의 로마 화실이다.오라치오 젠틸레스키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카라바조라는 이탈리아 화가의 친구로, 슬하에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딸을 두고 있었다. 그 딸의 이름은 아르테미시아로 서양 미술사의 최초 여류 화가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아르테미시아의 예술적 재능은 이미 10대 후반부터 두각을 나타냈지만 로마 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아르테미시아는 탁월한 미술 솜씨만큼이나 놀라운 미모를 가진 소녀였다. 오라치오는 아예 딸의 미모를 이용해 돈벌이에 나섰다. 아르테미시아를 자신의 누드 모델로 썼고 자연스레 로마 귀족들은 이 부녀(父女)가 함께 그린다는 에로틱한 작품에 호기심을 보였다.이 위태로운 탐욕의 비즈니스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모의 18세 소녀 아르테미시아가 아버지의 화실에서 아버지의 동료였던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강간을 당한 것이다. 결국 1612년 3월 16일, 타시는 강간 혐의로 체포되었고, 같은 해 11월 27일 판결이 내려졌다.미성년자를 강간한 타시에게는 5년간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형벌을 선택하거나 로마를 떠나라는 비교적 관대한 처벌이 내려졌다. 피해자였던 아르테미시아가 사고를 자초한 부분이 있다는 로마 사람들의 끊임없는 가십(Gossip)이 관대한 판결의 이유였다. 피해자였던 아르테미시아는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을 당했고, 그녀의 탁월한 재능도 사장(死藏)될 위기에 처했다.모든 것을 포기한 아르테미시아는 로마의 3류 화가였던 피에트로 스티아테시에게 팔려간다. 그녀의 재능을 아끼던 한 후원자가 결혼 지참금을 지불하겠다고 보증하자 큰 빚에 시달리던 피에트로가 강간당한 피해자인 아르테미시아와 결혼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지참금을 목적으로 추진된 결혼식은 서둘러 거행됐다.이 신혼부부는 1612년 12월 13일, 서둘러 로마를 떠나 메디치 가문 출신의 대공 코시모 2세가 통치하던 피렌체로 이주했다. 신랑 피에트로의 부친은 피렌체 출신으로 코시모 2세의 양복 재단사였다. 이 젊은 부부는 피렌체의 새로운 주민이 되었고, 젠틸레스키란 성 또한 바꾸어 아르테미시아 로미란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름을 숨긴 위장술도 잠시 뿐, 그녀의 본명에 얽힌 로마의 추문은 곧 피렌체의 사교가에 알려졌다.세월이 흘러 1615년 3월 15일. 피에트로와 아르테미시아가 운영하던 화실에 20명의 귀한 손님들이 방문했다. 아르테미시아의 유명한 작품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를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전격적으로 화실을 방문한 사람은 피렌체의 대공이자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였던 코시모 2세였다. 당시 스물다섯 살 청년이었던 대공 코시모 2세는 로마의 여류화가 아르테미시아의 숨기고 싶은 전력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영주에게 과거의 추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확인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르테미시아의 실력이었다. 코시모 2세는 그의 아내 마리아 막달레나를 동행시켰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피렌체 지식인들도 함께 작품을 감상하게 했다. 그들 중에는 이제 50의 나이에 접어든 과학자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있었고 피렌체를 대표하던 38세의 화가 크리스토파노 알로리도 있었으며 미켈란젤로의 친조카이자 대학교수였던 부로나오티도 함께했다.이들은 산 피에르 마조레 구역의 아르테미시아 화실에서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를 함께 감상한다. 로마 최고의 미술 후원자였던 스치피온 보르게세 추기경이 그렇게 탄복했던 유명한 그림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 작품의 폭력적인 화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미모의 유대 여성이었던 유디트가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칼로 베고 있는 작품이며, 자신을 강간했던 타시의 얼굴을 홀로페르네스로 그렸던 것으로 유명하다.다른 관람객들은 화면에서 뛰어나올 것 같은 피투성이에 질겁했지만 코시모 2세는 아르테미시아의 실력에 찬사를 보냈다. 코시모 2세는 “아버지의 솜씨보다 더 낫지 않소?”라고 동료들에게 물으며, 긴장하고 있던 비운의 여류 화가를 크게 칭찬했다. 그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의 복제본을 고가에 주문하고 ‘류트를 켜는 여인’과 ‘마리아 막달레나’를 추가로 주문함으로써 피렌체의 새로운 여성 예술가가 탄생했음을 온 세상에 알렸다.남성 위주의 가치가 지배하던 험악한 세상에서 아르테미시아는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은총을 입게 된 것이다. 과거의 슬픔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창작의 열정에 온 몸을 던질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아르테미시아의 명작은 메디치 가문의 박물관에 지금도 소장돼 있다.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21세기 메디치 경영자들의 주된 임무는 최고의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다. 나이도, 과거도 묻지 마시라. 오직 최고의 실력을 가졌는지를 물으시라.최선미·연세대 경영대학 교수김상근·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