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 긴급 점검 - 일본
요즘 일본 경제에도 모처럼 ‘봄바람’이 불고 있다. 주가가 바닥을 치고 회복세를 보이고 급속한 엔고도 완화되는 조짐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당초 예상했던 ‘최악의 경제 위기’는 이제 끝난 것 아니냐는 낙관론이 고개를 들고 있기도 하다.그러나 일본 경제 한쪽에선 4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발표되는 주요 기업과 은행의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 실적 쇼크로 인해 다시 주가가 폭락하고 기업 자금난이 심화되는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5월 위기설’이 나돌고 있다. 아직은 안심할 단계가 아니라는 얘기다.최근 일본 경제의 긍정적 신호는 일단 주식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작년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곤두박질치면서 7055엔(3월 10일)까지 떨어졌던 도쿄 증시의 닛케이평균주가는 최근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바닥을 지난 뒤 한 달여 만에 8800대까지 뛰어 올랐다. 일본 정부가 잇따라 경기 부양책을 발표하고 미국과 유럽 금융회사에 대한 경영 불안이 다소 후퇴하면서 도쿄 증시가 생기를 되찾고 있는 것. 지난 3월 중 도쿄 증시의 하루 평균 주식 거래량은 전월에 비해 8.4%, 하루 평균 주식 거래액은 8.9% 증가해 주식 거래도 원기를 회복한 모습을 보였다.지난 2월 한때 달러당 80엔 선까지 떨어졌던(엔화 강세) 엔·달러 환율도 최근엔 100엔 선 안팎으로 회복됐다. 그동안 일본 수출 기업들을 괴롭혔던 살인적인 엔고가 다소 완화됐다는 얘기다.실물경제 쪽에서도 미약하지만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경기 변동을 직접 피부로 느끼는 택시 운전사, 편의점 점장 등을 대상으로 일본 정부가 매월 조사하는 ‘경기 워처 조사’ 결과 현상판단지수(DI)는 작년 12월을 바닥으로 3개월째 상승했다. 일본 내각부는 “경기 상황이 여전히 어렵지만 악화 정도는 다소 완화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과거 2002년 2월 경기가 바닥을 치고 상승할 때도 4개월 전인 2001년 10월부터 경기 워처 현상판단지수가 저점을 기록한 뒤 회복된 점을 감안하면 경기 회복 시점이 머지않았다는 낙관적 전망도 나온다.물론 일본의 실물경제는 아직 바닥을 헤매고 있는 만큼 전망을 낙관하긴 이르다는 지적도 많다. 사실 일본의 실물지표는 여전히 어둡다. 일본의 광공업생산지수는 지난해 9월 이후 급락하기 시작해 11월부터는 3개월 연속 사상 최대 하락률을 갈아 치웠다. 지난 2월 광공업 생산은 전월비 9.4% 감소했다.3월 단칸지수(단기경제관측조사)도 사상 최악을 나타냈다. 제조업 대기업의 현상판단지수는 마이너스 58로 직전 조사인 작년 12월(마이너스 24)보다 34포인트나 낮아져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일본은행이 3개월마다 실시하는 단칸지수가 마이너스를 기록하기는 3회 연속이다. 단칸지수는 현재의 경기가 ‘좋다’고 응답한 기업에서 ‘나쁘다’고 응답한 기업의 비율을 뺀 수치다. 대기업 제조업의 현상판단지수가 지금까지 가장 나빴던 때는 제1차 오일 쇼크 직후인 1975년 5월의 마이너스 57이었다.단칸지수가 사상 최악을 기록한 것은 세계적인 금융 위기 이후 수요가 위축된 데다 엔화 가치 상승까지 겹쳐 일본의 수출이 급감한 것이 결정적 요인이다. 실제 올 1분기(1~3월) 자동차와 전기·전자 등 수출 주력 기업들은 일제히 감산에 돌입하는 등 경영 환경이 급속도로 악화됐다.이 때문에 일본은행도 4월 7일 금융정책결정회의 직후 내놓은 발표문에서 최근 경기 상황을 결코 낙관하지 않았다. 일본은행은 “일본 경제 상황이 심각하게 악화했다”며 “시간이 갈수록 한층 더 악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본은행은 또 “산업생산은 계속 감소하는 추세”라며 “일본 경제는 2009년 하반기부터나 회복 조짐을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최근엔 ‘5월 위기설’까지 나돌면서 금융 위기가 끝났다고 단정하기는 시기상조라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일본에서 돌고 있는 5월 위기설의 도화선은 4월 말부터 시작되는 주요 기업들의 결산 실적 발표다. 대부분의 기업이 3월 말 결산인 일본에선 4월 말부터 5월에 걸쳐 경영 실적이 공표된다. 예컨대 도요타자동차는 5월 8일, 파나소닉은 5월 15일 2008 회계연도 실적을 내놓는다. 이때 상당수 기업의 실적이 예상보다 나쁠 수 있다는 게 시장의 우려다.실제 미쓰비시UFJ·미즈호·미쓰이스미토모은행 등 3대 은행은 흑자를 낼 것으로 기대됐지만 최근엔 총 1조 엔(약 13조 원)의 손실이 난 것으로 분석됐다. 미쓰이스미토모은행은 3900억 엔의 최종 적자를 냈다고 이미 발표했다. 이렇게 실적이 나쁜 기업이 속출하면 주가는 폭락할 수밖에 없다.이때 문제가 되는 건 시중은행들의 재무 손실이다. 일본 은행들은 기업들의 주식을 상호 보유 형태로 대량 소유하고 있다. 기업 주가 폭락은 은행들의 보유 주식 평가손실을 키운다. 다이와종합연구소에 따르면 6대 시중은행의 보유 주식 평가손은 지난 3월 말 3400억 엔(약 4조6000억 원)에 달했다. 주식 평가손은 은행들의 자기자본을 갉아먹는다.일정한 자기자본비율을 지켜야 하는 은행 입장에선 기업 대출을 조일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매출 감소로 고전하는 기업들의 자금줄까지 막히면 줄도산을 피할 수 없다. 금융 시스템과 실물경제가 동시 붕괴되는 경기 위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게 ‘5월 위기설’의 흉흉한 시나리오다.일본 정부도 ‘5월 위기설’을 부인하지 않는다. 요사노 가오루 재무·금융상은 4월 10일 “다양한 자금 지원책으로 기업들이 3월 말 결산은 무사히 넘겼지만 5월이 또 한 번 고비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국내총생산(GDP)의 3%에 달하는 15조 엔(약 200조 원)의 재정 투입 규모의 경기 부양책을 최근 발표하고 주가 급락에 대비해 공적자금을 최대 50조 엔까지 쓸 수 있는 ‘증시안전판’을 마련하기로 한 것도 그런 고비를 대비해서다.일본은행도 5월 위기에 대비해 기업에 대한 자금 공급을 늘린다는 방침이다. 일본은행은 4월 7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시중은행에 돈을 빌려줄 때 받는 담보 범위를 확대해 자금 공급을 늘리기로 했다. 자금난을 겪고 있는 기업들에 대한 지원을 더욱 강화한 것이다. 일본은행은 이에 따라 앞으로 은행에 대출해 줄 때 지방자치단체 등이 발행한 ‘지방채’도 담보로 받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시장에서 매수자를 모집하는 공모채만을 담보로 인정해 왔다. 앞서 일본은행은 기업어음(CP)과 은행의 후순위채를 매입하는 등 다양한 유동성 공급 방안을 추진했지만 기업들의 돈 가뭄은 여전히 여전하다는 지적이 많다.그러나 이런 대책들의 핵심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통과돼야 실행이 가능하다. 민주당 등 야당이 과반 의석을 장악하고 있는 참의원(상원 격)에서 관련 법안이 부결되면 상당수 대책이 물거품이 된다. 에구치 가즈키 데이코쿠데이타뱅크 도쿄지사장은 “야당이 경기 부양책 등에 반대해 국회 의결이 늦어지면 ‘5월 위기’를 재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지금 불안과 긴장 속에 5월을 맞고 있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