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통신

굳이 영화의 장면들을 거론할 필요도 없다. 국가 정상들의 경호가 얼마나 치밀하고 엄중한 것인지는 일반인들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1개국도 아닌 16개국 정상이 한곳에 모였는데, 이들이 직접적인 신변의 위협을 느껴 모두 비상 탈출하는 믿지 못할 상황이 발생했다. 바로 4월 11일 태국 파타야에서였다. 이들 정상들은 ‘아세안+3(한·중·일)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이곳에 모였다. 이를 위해 이명박 대통령은 전날 오후 5시쯤 파타야에 도착했다.이날 파타야는 전시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무정부 상태,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16개국 정상들은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를 지지하는 단체인 ‘독재저항 민주주의 연합전선(UDD)’의 시위에 맞닥뜨리면서 하루 종일 긴박한 상황이 이어졌다.이 대통령이 묵은 두싯타니 호텔도 아침부터 긴장감이 팽팽했다. 이 대통령은 오전 10쯤 두싯타니 호텔을 떠나 정상회의장인 로열 클리프 호텔로 가려고 했지만 UDD가 이끄는 시위대 수백 명이 택시 100여 대를 앞세워 호텔 앞을 봉쇄하는 바람에 포기해야만 했다. 청와대 경호팀에 비상이 걸린 것은 물론이다. 이 호텔엔 원자바오 중국 총리도 투숙했다. 정상회의 일정 차질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한·중·일 정상은 회의장으로 가지 않은 채 12일로 잡혔던 3국간 회담을 하루 앞당겨 오후 2시쯤 두싯타니 호텔에서 긴급하게 가졌다. 이런 소식이 청와대 출입 기자들이 있는 프레스센터로 시시각각으로 전달되면서 기자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급히 UDD 시위 현장으로 달려갔다.시위대의 목적은 정상회의가 열리기 전 이 호텔에서 예정됐던 아세안+3 외무장관 회의를 막기 위해서였다. 아세안+3 외무장관 회의를 무산시킨 시위대는 봉쇄를 풀고 파타야 해변을 따라 약 4km 떨어진 정상회의장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기자의 눈에 띄었다. 대형 폭죽과 화염병, 새총, 각목,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한 채 택시와 픽업트럭 등에 나눠 타고 도로를 거의 점령하다시피 했다. 이들은 빨간 옷을 입고 시위를 벌인다고 해서 ‘레드 셔츠’로 불린다. 1000여 명으로 불어난 UDD는 정상회의장을 지키려던 푸른 옷차림의 현지 주민들과 격렬한 충돌을 벌였다.현지 경찰과 주민들의 저지선을 뚫은 UDD 시위대는 로열 클리프 호텔의 유리문을 깨고 정상회의장 미디어센터로 들어갔다. 이들은 금속 탐지기를 넘어뜨리고 탁자 등 기물을 파손했고,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는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그를 찾아 회의장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살벌한 분위기였다. 현장에는 경찰이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제지에 나서지 않는 모습이었다. 경찰이 친 탁신 성향이기 때문이라는 게 현지 외교 관계자들의 전언이었다. 심지어 시내에 배치된 경찰들은 팔짱을 낀 채 시위대를 구경하면서 그들과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군인들도 시내 군데군데 있었지만 시위대에 미온적이었다.회의장이 점거 당하자 각국 정상들은 비상 탈출에 나섰다. 헬기와 스피드보트가 긴급 투입돼 가까스로 현장을 벗어났다. 일부 정상의 영부인은 공포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아피싯 태국 총리는 정상 가운데 맨 먼저 헬기를 이용, 파타야 외곽 우타파오 군비행장으로 피신했다. 이어 응웬 떤 중 베트남 총리, 테인 세인 미얀마 총리,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이동했다. 이 때문에 파타야의 상공은 오후 내내 헬기 소리로 소란스러웠다.이 대통령은 다행히 정상회의 장소인 로열 클리프 호텔에 묵지 않아 큰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 대통령은 회의장 점거 소식이 전해지자 조기 귀국을 결심했다. 즉각 모든 수행원과 기자들에게 이 사실이 통보됐다. 경호팀은 태국 주변국 영공 통과 허가를 신청했으며 현지 경찰에 호위를 요청했다. 이 대통령은 한·중·일 정상회담이 끝난 오후 4시 공항으로 직행했다. 시위 현장에서 프레스센터로 들어와 기사를 작성하던 중 부랴부랴 짐을 싼 기자들은 이 대통령보다 한발 늦게 공항에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비행기에서 기자들을 기다리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 발생했다. 이 대통령의 특별 전세기는 오후 5시 40분 이륙할 수 있었다. 정말 아슬아슬한 하루였다.홍영식·한국경제 정치부 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