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점화된 민간 선박의 무장 논쟁

미국 해군의 극적인 구출 작전으로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된 리처드 필립스 머스크 앨라배마호 선장이 탈출하면서 세계의 이목이 소말리아 해역으로 쏠렸다. 세계 최강 미군과 맞서는 해적들의 기세가 그치지 않으면서 민간 선박에도 무장을 허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쟁이 점화되고 있다. 근대화의 진전과 함께 민간 선박들이 ‘무장해제’한 지 수십 년 만에 다시 ‘만인대 만인의 투쟁’의 구시대 모습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뉴욕타임스(NYT)는 최근 “소말리아 해역에서 민간 선박들이 해적의 공격을 받는 사건이 빈발하자 민간 선박에도 무장을 허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쟁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논쟁의 발단은 필립스 선장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미 해군 저격수가 해적 3명을 사살하면서 불거졌다. 소말리아 해적들이 다른 미국 선박에 보복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것. 실제 해적들은 자신들을 무력으로 소탕했던 미국과 프랑스에 “보복하겠다”고 공언했고 그리스 화물선과 토고 선박을 납치했다. 인도주의적 지원 물자를 싣고 가던 미 화물선 ‘리버티 선’호를 공격, 배에 손상을 입히는 등 ‘보복 납치’ 행위도 발생했다. 이와 함께 말레이시아 인근 말라카 해협을 비롯해 인도양과 소말리아 인근 등 막강한 해적이 출몰하는 지역도 넓어지고 있다.이에 따라 자위권 차원에서 민간 선박도 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민간 선박의 무장은 사실 지난 수세기 동안 흔한 일이었다. 17세기 이후 민간 선박과 군용선은 사실상 구별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민간 선박이 군용으로 전용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야말로 무자비한 힘의 논리, 총칼의 힘이 난무하는 곳이 바다였다. 선주가 선원의 안전 등을 이유로 무기 소지를 금지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에 불과하다.그렇지만 어렵사리 정착한 해상 비무장 트렌드에 주요 해역의 해적들이 재를 뿌리고 있다. 뉴욕의 해운 전문가 배리 파커는 “이번 소말리아 해역 피랍 사건을 계기로 민간 선박의 선장들에게 무기를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에 대한 국제적 합의가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反)테러 움직임이 확산되면 민간 상선의 재무장이 더욱 탄력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반면 홍콩의 해운 전문가 매튜 플린은 “무기 소지가 과연 선박과 선원의 안전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지 의문”이라며 “동아프리카 해역을 지나는 배 소유주를 포함한 대다수 선주들도 선원들이 무장하는 것을 반기지 않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해적과의 교전 중에 선원이 사망하거나 다치면 보상비나 법적 처리에 있어서 해적에게 몸값을 주는 것보다 복잡해질 수 있다는 것.이와 함께 배들이 무기를 싣고 다니면 무기를 노린 해적들이 그동안 안전하던 해역의 민간 선박에 대해서도 공격할 것이란 우려도 있다.민간 선박의 무장이 해적 선박의 중무장을 이끄는 악순환이 될 수도 있다. “민간 선박이 소총을 갖추면 해적선은 기관총을 갖출 것이고, 민간 선박이 소형 로켓포를 마련하면 해적선은 중형 로켓으로 약탈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는 셈이다.이와 함께 항구 대부분은 민간 선박에 무기를 비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각 국가의 이 같은 규정을 한꺼번에 변경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해적의 주요 표적인 유조선에 무장을 갖추면 더 큰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유조선 선원과 해적 사이에 총격전이 발생하면 휘발유나 경유 등에 불이 붙어 대형 화재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민간 선박이 무기가 아닌 다양한 평화적인 장비들로도 배를 지킬 수 있다고 조언한다. 해군에게 지속적으로 선박의 위치를 알리는 장치를 마련하고 긴급 구호 요청을 할 수 있는 긴급 버튼을 활용하라는 주장이다. 또 해적의 공격을 받을 때는 소방용 호스를 이용해 물대포를 쏘거나 소방용 도끼로 해적의 이동 통로를 차단할 수도 있다.1992년 해적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는 존 버넷은 “필립스 선장 사건으로 해적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는 것은 좋다”면서도 “군사력 등을 통해 해적을 자극하게 되면 죽음에 이르는 싸움이 촉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김동욱·한국경제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