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기 시작한 공장
일본 기업들이 작년 말 이후 대규모 감산에 돌입하면서 세웠던 공장을 4월 들어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자동차·전자·화학 등 주요 제조업체들이 감산 폭을 줄이고 생산을 늘리고 있다.그동안 감산으로 재고 조정이 어느 정도 일단락된 데다 중국의 대규모 경기 부양으로 인해 수요가 점차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시장이 안정되고 있는 가운데 실물경제 침체도 서서히 바닥이 보이고 있는 모습이다.여기에 일본 정부는 사상 최대 규모의 예산을 투입해 내수 부양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대규모 감세를 실시하고 자동차와 가전제품 구입 등에 보조금을 지급해 소비를 부추기겠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제조업체들에 더욱 힘을 불어넣어 침체의 바닥 탈출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4월 들어 생산을 본격 늘리기 시작한 업종은 산업 기초 소재를 만드는 화학이 대표적이다. 특히 자동차 부품이나 가전제품의 외형 등에 사용되는 합성수지의 기초 원료인 에틸렌 공장 가동률이 크게 높아졌다. 최대 화학 업체인 미쓰비시화학은 에틸렌 공장 가동률을 3월 중 70%에서 최근 80%로 끌어올렸다. 이 회사는 작년 말까지 10% 정도 감산해 오던 중국과 한국의 폴리에스터 원료 공장도 최근 풀가동하기 시작했다.미쓰이화학은 70%였던 에틸렌 공장 가동률을 2분기(4~6월)중 80%로 상향 조정할 계획이다. 쇼와전공이나 스미토모화학 등도 에틸렌 공장 가동률을 최대 90%까지 올릴 방침이다.올 2월 중 일본의 폴리프로필렌 등 주요 수지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80% 증가했다. 중국의 수요가 살아난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중국 정부가 내수 진작을 위해 가전제품이나 자동차를 사는 사람들에게 보조금을 나눠줌에 따라 관련 제품 수요가 살아난 덕분이다.도요타자동차 닛산자동차 등 자동차 업체들이 이달부터 감산 폭을 줄이기로 함에 따라 자동차 부품 생산도 늘어날 전망이다. 자동차 부품 업체들은 1분기 전년 대비 절반 정도로 줄었던 수주량이 2분기에는 다소 회복될 것으로 보고 있다.피크 때에 비해 절반 이하로 생산량을 줄였던 전자 부품 업체들은 2월까지 재고조정을 마치고 생산을 늘리고 있다. 일본 내 가전시장은 여전히 침체이지만 중국 등으로의 수출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라타제작소는 전기를 충전하는 콘덴서의 생산 공장을 3월엔 5일간 휴업했지만 4월부터는 정상 가동하기로 했다. 주로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콘덴서 공장의 가동률은 올 1~2월 40%에 그쳤지만 3월엔 60%까지 회복됐다. 4월엔 75%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전자 부품 업체인 알프스전기도 휴대전화용 스위치 등의 생산 공장 가동률을 50% 미만에서 50% 이상으로 상향 조정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전자 부품 등에 폭넓게 사용되는 전해동(電解銅: 전해 구리) 박(箔)을 생산하는 닛코금속은 1월 초순까지 20%에 불과했던 필리핀 공장 가동률을 80% 선으로 끌어 올렸다.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의 나가하마 도시히로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의 주요 제조업체들은 작년 말 이후 판매 감소를 훨씬 웃도는 감산으로 최근 재고 조정을 마치고 생산을 조금씩 늘리고 있다”며 “그러나 앞으로 증산 규모가 얼마나 클지는 수요 회복에 따라 좌우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와 여당인 자민당은 수요 진작을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의 경기 부양책을 추진 중이다. 이번 경기 부양책에서 눈길을 끄는 건 정부가 경기를 살리기 위해 쏟아 부을 재정지출 규모다. 일본 정부는 대략 11조~14조 엔(약 150조~200조 원)을 투입한다는 계획이다.아소 다로 총리는 요사노 가오루 재무·금융·경제재정상에게 추가 경제 대책의 재정지출 규모에 대해 “국내총생산(GDP)의 2%를 초과하는 대책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GDP 2%’는 미국의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이 지난 3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연석회의에서 주요 각국에 경기 자극을 위한 수치 목표로 제시한 것이다.일본은 올해 본예산에 포함된 경기 대책 예산을 포함할 경우 추가로 3조 엔 정도면 GDP(약 500조 엔)의 2%(10조 엔)가 된다. 하지만 아소 총리는 추가경정예산만으로 GDP의 2%를 지출하도록 했다.이에 따라 추경예산안 규모는 10조 엔을 넘어 사상 최대 규모가 될 게 확실하다. 지금까지 경기 진작용 추경예산 규모가 가장 컸던 건 1998년 제3차 추경예산으로 7조6380억 엔이었다. 재정지출은 지하수를 퍼 올리기 위해 펌프에 최초 투입하는 마중물, 즉 일본어로는 ‘마미주(眞水)’다.아소 총리는 경기 부양책의 중점 추진 사항으로 △비정규 노동자의 새로운 안전망 구축 △기업의 자금 조달 대책 강화 △태양열발전의 대폭 확대 △간병·지역 의료에 대한 국민 불신 해소 △지자체의 지역 활성화 노력 지원 등 5개 항을 강조했다.특히 이번 대책은 ‘감세’가 핵심이 될 전망이다. 가장 주목되는 건 증여세 감면이다. 일본 정부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주택이나 자동차 구입용으로 돈을 주는 경우 한시적으로 증여세를 면제해 줄 방침이다.= 일본 정부 내에서는 현재 하이브리드카 등 저공해 자동차와 태양광발전을 이용한 에너지 절약형 주택을 구입할 목적으로 부모로부터 받은 돈에 대해선 증여세를 면제해 주는 조치를 몇 년 간 한시적으로 적용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이 같은 증여세 감면은 경우에 따라 일반 자동차나 주택 구입용 자금으로도 확대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일본은 현재 증여 재산액 중 110만 엔(약 1500만 원)을 기초 공제한 뒤 나머지 금액에 대해선 10~50%의 누진세율로 증여세를 부과하고 있다. 현재 검토되고 있는 것은 주택·자동차 구입용 등 정해진 용도에 대해선 110만 엔으로 정해진 기초 공제 한도를 대폭 올리거나 아니면 증여세를 전부 면제해 주는 방안 등 두 가지다.일본 정부가 이 같은 증여세 감세를 추진하는 것은 노인들의 뭉칫돈을 젊은 세대의 소비자금으로 이전하기 위해서다. 일본의 개인들이 예금이나 채권 등으로 보유하고 있는 금융자산은 천문학적 규모인 1400조 엔에 달한다. 하지만 이 돈의 75%를 소비 성향이 낮은 60세 이상 고령자가 갖고 있어 거의 금융회사 금고에서 잠자고 있다.일본 정부는 증여세 감면뿐만 아니라 기업들에 대한 감세도 적극 고려하고 있다. 기업이 적자를 낸 경우 전년도에 냈던 법인세의 일부를 환급해 주는 제도를 올해 안에 도입하는 것을 검토 중이다. 법인세 환급은 일단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도입하되 대기업으로도 확대시킨다는 방침이다. 연구·개발(R&D)비에 대한 세액공제를 확대하거나 중소기업의 법인세율을 내리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또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이나 채권 등 유가증권 가격이 매입 가격(장부 가격)보다 50% 이상 떨어진 경우 평가 손실분을 비용(손금)으로 처리하기 쉽도록 해 법인세를 경감해 주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최근 주가 하락으로 결산에서 손실 확대가 불가피한 기업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다.일본 정부와 여당은 이 같은 추경예산안과 세제개정법안 등 관련 법안을 4월 말 국회에 제출해 5월 중순 중의원에서 가결시킨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야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참의원에서 심의가 늦어질 가능성도 있다. 참의원의 심의가 늦어질 경우에는 중의원 재가결에 필요한 60일을 기다려야 한다. 이 때문에 7월 중순에나 법안이 확정된다.아소 총리는 야당이 추경예산안에 반대해 조기 성립을 막을 경우 중의원을 조기 해산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번 경기부양책은 일본의 차기 총선거와 맞물려 일본 정국의 향방도 좌우할 전망이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