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라도 영광의 가난한 시골 집안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두부 공장을 하며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느라 늘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하셨지만 살림살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몇 년 후 두부 공장을 그만두고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무렵 아버지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다른 도시를 돌아다니셨고 어머니는 시장 한 구석 행상에서 삶은 고구마를 판 돈으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갔다.여덟 살, 한창 군것질을 하고 싶었던 나는, 어머니가 시장에서 고구마를 팔아 번 돈을 장판 밑에 놓아두는 것을 알게 됐다. 어느 날 나는 그 돈을 엄마 몰래 빼내 친구들과 군것질을 실컷 하고 신나게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만 아버지에게 들통이 나고 말았다. 그날 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매를 맞았다. 그날 밤 나는 아버지가 생채기에 빨간약을 발라주시면서 내 팔에 눈물을 떨어뜨리며 우시는 걸 보았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아직도 그 모습이 기억이 나는 건,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나는 앞으로 아버지가 저렇게 슬퍼할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다.초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서울로 전학했다. 당시 시골에서 서울로 전학하는 학생이 드물어 친구들은 나를 무척 부러워했고, 나 역시 무슨 큰 성공이나 한 것처럼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러웠다. 서울 아현동 산꼭대기 달동네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아버지는 을지로에 있는 인쇄소에 다니셨고 그때부터 아버지는 퇴근길에 간식거리를 사다 주셨다. 호빵 군고구마 호떡 등을 가슴에 품고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집 안에 들어서는 아버지를 보며 우리들은 뛸 듯이 좋아했고 난 더 이상 길거리의 간식거리들을 탐내지 않았다. 비록 가난했지만 그때가 내 인생에서 무척이나 행복한 시기였던 것 같다.이후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할머니와 작은아버지의 도움으로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서 쌀가게를 시작하셨다. 나는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방과 후면 늘 아버지를 도와 쌀 배달을 했다. 쌀 배달하는 집들이 산 중턱에 있고 심한 비탈길이 많았기 때문에 자전거로 쌀을 배달하는 것은 어린 나에게 꽤나 힘에 부친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땀을 흘리며 늘 새벽에 나와 열두 시가 넘도록 일하셨기 때문에 돕지 않을 수 없었다.자전거로 쌀을 배달하면서도 한 손에는 책을 들고 공부하는 내 모습을 보고 말씀도 없고 표현도 잘 안 하시는 아버지이긴 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윽한 눈빛을 통해 사랑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눈빛만으로도 난 힘을 얻었고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해 결국 치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6년 동안 군 장학금으로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받아 졸업할 수 있었다.정말 아버지에게 혼쭐났던 그날의 다짐처럼 그 후로 단 한 번도 아버지의 꾸지람을 듣지 않고 자랐다. 너무 일찍 철이 들긴 했지만 그런 날 지켜본 바로 밑의 남동생도 혼자 힘으로 명문 의대에 진학해 의료인의 길을 걷고 있다.10남매 중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중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게 평생의 한이 되셨다. 그런 아버지는 나의 대학 졸업식 때 학사모도 쓰고 가운도 입고 두 손으로 꽃다발을 쥔 채 마치 본인의 졸업식인 것처럼 사진을 찍으셨다. 늘 무뚝뚝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던 아버지는 그날만큼은 너무나 흐뭇하고 행복한 표정이어서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내 입가에도 미소가 지어지곤 한다.그러던 아버지는 몇 년 후 내가 군복무 중이던 1994년 위암을 판정받고 투병하시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몸도 제대로 돌보지 않고 너무 열심히 일하신 데다 가정 형편 때문에 정기적인 건강검진도 제대로 받지 못해 그런 것 같아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의 치아를 치료해 드리는 게 꿈이었는데, 그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아버지를 떠나보낸 것이 아직도 깊은 회한으로 남는다. 연세 드시고 치과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하는 어르신들을 뵐 때마다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가슴 한쪽이 뭉클해진다.최우환·궁플란트치과 원장국군 대전지구병원(계룡대) 치과부장으로 근무하다 예편했다. 현재 궁플란트치과 원장이며 연세대 치과병원 임상외래 교수를 겸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임플란트학회 정회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