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과 끈기의 리더십 ‘카트린 데 메디치’
카트린은 프랑스 궁정 사람들에게 식탁에서 우아하게 음식을 먹는 법을 가르쳤다. 프랑스 식탁에 처음으로 포크와 나이프가 사용된 것은 카트린의 공이다. 카트린 이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귀족들은 스테이크를 손으로 집어 먹었다. 그녀는 문학 음악 시 회화 조각 건축에 조예가 깊은 전형적인 메디치 가문의 총명한 사람이었다.다른 메디치 가문의 사람처럼 카트린도 예술을 열렬히 후원했다. 그녀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으며 지리학 천문학(특별히 점성술) 물리학 수학 분야의 지식은 프랑스 왕궁의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탁월했다. 심지어 프랑스 여성들에게 최초로 속옷을 입게 한 것도 카트린의 공헌이었다.당시까지 프랑스 여성들은 ‘남성의 옷’인 속바지나 팬츠를 입을 수 없었다. 속옷을 입은 카트린은 말을 탔을 때 마음껏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다른 프랑스 여성은 (속옷을 입지 않아) 두발을 한 방향으로 모으고 말을 탔기 때문에 속도를 낼 수 없었지만 새로운 패션을 선택한 카트린은 달랐다. 메디치 여성의 이탈리아 패션은 프랑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남편의 애첩으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던 불쌍한 카트린은 어떤 순간에도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굴욕을 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카트린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프랑스 왕실의 후계를 이을 후손을 낳는 일이었다. 그녀는 시녀와 점성술사를 동원하는 것도 모자라 온갖 민간 비법을 섭렵했다. 카트린이 가장 신뢰했던 점성술사의 이름은 노스트라다무스였다.카트린이 사용했던 비술이 효험이 있었는지, 결국 11명의 많은 자녀를 낳았고 그중에서 7명이 성인으로 살아남았다. 그중 3명의 아들들이 차례대로 남편의 뒤를 이어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카트린은 인내의 세월이 가면 희망의 시간이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침내 바람기 많던 남편 앙리 2세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1559년).마상 창 경기(Joust)를 하다가 상대방의 창이 앙리 2세의 눈과 두개골을 뚫고 들어가 뇌 속으로 파고들었다. 왕비 카트린과 애첩 디안이 함께 울음을 터뜨렸지만 그 울음의 의미는 각각 달랐다. 디안은 지금까지 마음껏 조롱하고 비참할 정도로 모욕을 주던 왕비로부터 보복을 당할 차례가 왔음을 직감하면서 울었을 것이고, 카트린은 마침내 복수의 날이 왔음을 기뻐하면서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그러나 카트린은 디안에게 화해와 용서의 손길을 내밀었다. 여자 한 명을 죽여 과거에 상처 입은 자존심을 되살리는 것보다 승자의 자비심을 보여줌으로써 프랑스 국민 전체의 마음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카트린에게는 사자의 용맹도 있었지만 여우의 지혜도 또한 넘쳐흘렀다.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 된 장남 프랑수아 2세가 프랑스의 왕위를 이어가기 위해서 메디치 가문의 왕비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하는지 신중하게 판단했다.왕태후가 된 카트린은 프랑스의 섭정을 시작하면서 왕실과 국민, 귀족과 평민,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위그노),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의 평화 공존을 추구했다. 카트린은 남편과 사별한 다음부터 향락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언제나 검은색 옷을 입었기 때문에 그녀는 ‘검은 왕비’로 불렸다.남편을 사고로 잃고 아들 3명을 차례로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시키면서 카트린은 1559년부터 1589년까지 프랑스를 30년간 통치했다. 검은 왕비가 통치했던 16세기 후반의 프랑스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간의 끊임없는 종교전쟁이 계속되던 험악한 시대였다. 총 8번에 걸쳐 종교전쟁이 발발, 프랑스는 거의 내전에 가까운 폭력과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1572년 파리에서 발생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은 종교 갈등의 최고 절정판이었다.그러나 카트린은 두 종파 사이의 갈등 속에서 중립과 화해를 외치며 프랑스의 발전과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검은 왕비 카트린 데 메디치는 16세기 유럽의 역사를 쥐락펴락한 여걸이었다. 세 아들을 차례로 프랑스의 국왕으로 등극시켰으며 며느리로는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오스트리아의 공주 엘리자베스, 피렌체 공국의 왕족 마리아를 삼았으며 사위들은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2세와 같은 거물급 일색이었다. 모직 산업과 은행업에서 출발했던 피렌체의 평민 가문이 유럽 최고의 왕실 가문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메디치 가문의 한 못생긴 소녀가 이룩한 유럽 정치사의 위업이었다.아키텐 지방의 수석 주교였던 브루주 대주교는 1589년 2월 4일에 열린 카트린 데 메디치의 장례식에서 감동적인 조사를 발표했다. 브루주 대주교는 카트린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검은 왕비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인내와 끈기의 연속’이었다고 요약했다. 적절한 평가였다.카트린은 적수(敵手)의 비방이나 무시, 심지어 욕설과 같은 언어의 폭력 앞에서도 증오심을 품지 않은 채 끈기 있게 상대방을 관찰하고 분석하다가 마침내 그 적수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방안이 떠오르면 이를 과감하게 실행으로 옮기던 전형적인 메디치 가문의 전략가였다. 워낙 자제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자신이 세운 목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어떤 감정도 숨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다.낙천주의와 용기는 카트린의 또 다른 삶의 자세였다. 경쟁자였던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후원을 업고 한 귀족(콩데)이 반란을 일으키고 독일인 군대도 서진해 파리까지 진격하자 카트린은 반란군의 지휘관을 직접 만나 담판을 짓는다. 허허벌판에서 완전무장한 100명의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보무도 당당히 적진을 향해 말을 달린 사람은 바로 카트린 여왕 자신이었다.‘지도자의 조건’을 쓴 프란체스코 알베로니는 강조하고 있다. “전략적 사고는 단순화하는 기술이다. 불평불만과 탄식을 늘어놓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주저앉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복수와 시기심은 잊어버린다. 겁이 많거나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피한다. 위선적이거나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조언자들은 무시한다. 복잡하고 엉뚱한 아이디어는 버린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제안은 듣지 않는다. 명료하고 쉽고 기본적인 해결책을 찾는 데 집중한다.”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하나로 프랑스를 접수하고 통치했던 검은 왕비의 전략적 사고를 잘 요약하고 있다. 메디치 가문의 딸로 태어나 이탈리아 반도에 몰아닥친 전쟁과 반란의 와중에서 살아남았던 카트린 데 메디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한 권을 들고 혈혈단신으로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카트린 왕비는 ‘그 이탈리아 여자’로 불리며 온갖 수모를 받았지만 자신의 평화적인 정책이 프랑스의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으리란 믿음을 잃지 않았다.16세기 후반의 프랑스는 위기의 시대였다. ‘왕관을 쓴 괴물’들이 음모와 배신을 일삼으며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신뢰마저 허물어뜨리고 있을 때, 메디치 가문의 딸 카트린 데 메디치는 ‘은근과 끈기의 리더십’이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카트린은 프랑스로 시집오면서 자신의 좌우명을 개인 문장(紋章)으로 삼았다. 파란만장했던 삶을 관통했던 카트린 데 메디치의 좌우명은 ‘나는 빛과 평화를 가져 온다’였다.은근과 끈기의 리더십으로 프랑스에 ‘빛과 평화의 시대’를 선물했던 카트린 데 메디치의 리더십이 요구되는 위기와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에게 ‘빛과 평화의 시대’를 선물한 21세기의 카트린 데 메디치는 과연 누구일까.최선미·연세대 경영대학 교수김상근·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