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병 시너지’ 무장 KT

지난 3월 25일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생소한 TV 광고가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산악인 엄홍길 씨가 히말라야에서 악전고투하는 모습이나, SBS 인기 드라마 ‘아내의 유혹’에 등장하는 정교빈(변우민 분)이 집 밖으로 내몰리는 장면을 넣어 눈길을 끌었다.4월 8일 베일을 벗은 ‘QOOK(쿡)’ 은 KT의 새로운 상품 브랜드였다. 그간 메가패스, 메가TV, 집전화로 불리던 제품명을 쿡으로 통합해 ‘쿡인터넷’ ‘쿡TV’ ‘쿡전화’ ‘쿡인터넷전화’로 바꾼 것이다. 쿡이 나오면서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결합 상품’이라는 시장이 새로 생긴 셈이다. ‘쿡세트’와 쇼를 합친 결합 상품의 수는 100가지 넘는다.KTF의 이동통신 브랜드 ‘쇼’는 그대로 유지된다. 엄청난 물량을 투입해 쌓아 놓은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대신 유무선 통합 상품명은 지금의 ‘쿡앤쇼(QOOK & SHOW)’에서 새로운 브랜드를 5월 중순 쯤 내놓을 계획이다. SK텔레콤은 이미 무선 상품 브랜드 ‘티(T)’와 ‘브로드밴드’를 합한 ‘T밴드’를 4월 6일 내놓았다. KT의 쿡 출시에 맞불을 놓은 것이다.‘개고생’이라는 다소 ‘싸 보이는’ 용어를 선택한 것은 KT로서는 파격이다. 공기업 이미지가 남아 있던 KT가 브랜드 이미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말을 쓴 것은 더 이상 ‘점잖게’ 있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매출 정체는 최근 몇 년 동안 KT의 숙제였다. 포화 상태인 집전화(PSTN: public switched telephone network)와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 수를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민영화 이후 첫 최고경영자(CEO)였던 이용경 전 사장은 이를 ‘인터넷 종량제(사용한 만큼 요금을 내는 것)’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인터넷 강국의 소비자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후 초고속 인터넷 업계에서 ‘종량제’는 금기어가 됐다.그 뒤를 이은 남중수 전 사장은 IPTV(Internet Protocol Television: 인터넷 전용선 기반의 TV)로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했지만 뇌물수수 혐의로 중도 하차했다. 올해 1월부터 실시간 IPTV(공중파 방송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IPTV)가 시작됐지만 3월까지 3개 회사(KT, SK브로드밴드, LG파워콤)의 가입자 수는 21만 명에 그쳐 기대 이하의 실적을 보이고 있다.세 번째로 바통을 이어받은 이석채 회장의 무기는 ‘결합 상품’이다. KT의 최대 장점은 2000만 명에 달하는 집전화 가입자들이다. KTF의 이동통신 가입자는 1400만 명. 집전화 가입자들에게 ‘집전화+이동통신’ 결합 상품을 좋은 조건에 판매한다면 단순 계산으로 600만 명이라는 가입자를 늘릴 수 있는 셈이다. 또 집전화 1대를 쓰는 2~4명의 가족을 염두에 둔다면 600만 명 이상의 가입자를 노려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KT에서는 ‘쿡앤쇼’보다 더 친근하고 참신한 브랜드를 개발하고 있다.KT는 단순히 상품의 결합이 아닌 KT와 KTF의 합병을 들고 나왔다. KT와 KTF의 공식 합병일은 6월 1일. KT와 KTF의 합병은 전임 사장들도 시도했던 부분. 그러나 정부 규제와 경쟁사들의 반대로 쉽게 이뤄지지 못했지만 전직 정보통신부 장관 출신인 이석채 회장이 이를 추진하면서 정부와의 교감설이 돌기도 했었다. 애초 KT가 가진 유선 시장에서의 시장 지배력 때문에 KTF를 만든 것이기 때문에 쉽게 합병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합병이 되면 그간 따로따로 진행되던 상품 개발, 마케팅, 영업 등이 한 조직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트렌드 변화가 가장 빠르다는 통신 업계에서 재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시간적인 효율성과 함께 비용 절감도 예상할 수 있다.합병에 앞서 이 회장은 KT 내부 조직을 대폭 바꾸면서 강력한 구조조정을 예고한 바 있다. 현재 KT 직원은 3만5000여 명, KTF 직원은 4000여 명으로 모두 합해 3만9000여 명이다.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 직원을 다 합해도 7000명이 되지 않고 LG의 통신 3사(텔레콤, LG데이콤, LG파워콤)는 5500여 명 수준이다. 경쟁사와 비교해 볼 때 KT의 인력은 현재의 4분의 1 이하로 조정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럴 경우 무려 3만 명 이상을 떨쳐내야 한다.KT의 한 관계자는 “지금은 정부의 일자리 만들기 정책 때문에 KT가 당장 인력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지만 2~3년 뒤를 장담할 수 없다”고 전했다. 구체적인 시나리오도 예상되고 있다. 이 관계자는 “관리직을 영업직으로 보냈는데 영업이라는 것은 실적이 숫자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구조조정의 잣대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KT는 올해 1월 이석채 회장의 취임 이후 조직 구조를 유선전화, 초고속 인터넷, IPTV 등을 담당하는 사업 단위에서 홈고객부문, 기업고객부문, 네트워크부문 등 고객군별로 바꿨다.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한 것이다. 또 본사 및 지방 조직의 관리 인원 3000여 명을 영업 및 네트워크 관리 분야로 대거 배치했다.영업직으로 발령받은 3000여 명이 판매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KT의 인터넷 전화(VoIP: Voice over Internet Protocol)다. 이 회장 취임 이후 KT는 그동안 ‘집전화의 수성(守成)’이라는 전략을 버리고, 인터넷 전화 판매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 회장은 취임 초기 “VoIP가 대세인데 KT만 집전화에 머무를 수 없다”고 얘기한 바 있다. 실제로 KT의 인터넷 전화 가입자는 빠르게 늘고 있다. 올해 2월 말에 38만 명이던 고객이 3월 말에 49만 명으로 크게 늘어난 것이다. KT에서도 “집전화와 인터넷 전화를 합쳐 2000만 명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라고 얘기하고 있다. KT 집전화 가입고객은 지난해 2월 말 2084만 명이었으나 올 2월에는 1962만 명으로 줄었다. 인터넷 전화를 합쳐야 2000만 명이다.인터넷 전화 가입자가 빠르게 늘고 있는 상황에서 인터넷 전화가 포함된 결합 상품 구성을 다양화하고 있는 것이 현재 KT의 마케팅 전략이다. 수익 구조 면에서 인터넷 전화는 집전화보다 매출과 이익이 적게 날 수밖에 없다. 또 인터넷 전화 가입자가 늘수록 집전화 가입자는 줄어들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터넷 전화에 드라이브를 거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얘기다. KT 인터넷 전화 가입자 증가가 빠르다 보니 여기에 초고속 인터넷, IPTV, 이동통신을 덧붙여 시너지 효과를 내겠다는 얘기다.현재 이동통신은 SK텔레콤, 인터넷전화는 LG데이콤이 시장 지배적 사업자이지만 결합 상품만 볼 때 KT의 경쟁력은 충분하다. SK텔링크의 인터넷전화는 점유율이 미미하고, LG계열은 이동통신과 초고속 인터넷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이 틈을 KT가 인터넷 전화로 돌파하고 있는 것이다.올해 1월 이 회장이 취임한 뒤 KT는 합병, 구조조정, 브랜드 변경 등 숨 가쁘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이에 따라 경쟁사들의 대응 역시 합병, 구조조정, 브랜드 변경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SK 통신 계열사나 LG 통신 계열사는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 구조조정의 경우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의 일부 영업 조직을 떼어내 새로운 영업 법인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SK텔레콤 역시 T밴드를 출시하는 등 브랜드 전쟁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통신 전쟁’이 시작됐지만 정작 이를 통해 시장이 커질 가능성은 낮다. 집전화는 포화 상태가 된 지 오래고 이동통신 가입자는 국내 인구와 맞먹는 4600만 명, 인터넷 가입률은 80% 이상이다. 이미 이동통신 시장에서는 고객을 빼앗고 빼앗기는 마케팅전을 경험한 바 있다. 전쟁이 이동통신에서 ‘결합 상품’으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