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창단 해볼까?” “바쁜데 되겠어?” “아니야, 될 것 같아. OO형이 된댔어.”대학을 졸업한 지 22년 된 어느 날, 남편 친구들은 돌연 중창단을 하겠다고 모였다. 대부분 동기생들이었고 선배 한 명과 후배 한 명 등 모두 아홉 명이 모였다. 노래 공부는 핑계고 이젠 정기적으로 모여 놀자는 것 아니냐는 의심에 나를 포함한 모든 멤버들 부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이들은 매주 하루 저녁 여덟 시에 만나 두 시간 노래 공부를 했다. 모두 고만고만한 실력이지만 다소 떨어진다고 느낀 사람은 맹렬정진. 아침저녁으로 발성 연습에, 목에 좋다는 달걀 노른자위에, 오미자에, 개인 과외를 받기도 했다. 25년 이상을 알고 지내 온 친구들끼리 그 바쁜 중에도 1주일에 한 번씩 어렵게 시간을 내 연습실에서 노래를 부르니, 그 감격에 선생님 수업 시간이 끝나고도 집에 갈 줄 모르고 노래 연습을 하곤 했다. 예상과 달리, 남편은 다른 날은 늘 늦다가도 노래 연습하는 날이면 신나는 얼굴로 집에 일찍 들어왔다. 가끔 뒤풀이를 하고 늦게 오는 날도 있지만….중창단 이름은 ‘레몬 샤벳 싱어즈’. 좀 촌스러운 맛도 없지 않았지만 ‘레몬 샤벳’에는 이들이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1970년대에 대한 향수가 배어 있었다. 어쩐지 ‘레몬 샤벳’을 들으니 ‘어니언스’나 ‘트윈 폴리오’가 생각났다. 첫해 여름에 가진 첫 연주회 때의 드레스 코드는 ‘레몬색 넥타이’였다.그동안 배운 한국과 외국 가곡을 진지하게 불렀다. 명색이 중창단이라고 가요는 제외했나 보다 싶었더니, 이내 철 지난 뽕짝을 성악풍으로 익살스럽게 불러댔다. 서너 명이 무대에 올라가 뒤로 돌아서 있다가, 몰래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는 돌연 앞을 향해 돌면서 ‘소방차’의 ‘그녀에게 전해 주오’를 불렀다. 멤버들이 한창 결혼할 때, 친구들의 약혼식 뒤풀이 때마다 보여 주었던 흘러간 레퍼토리였지만 나이 든 후 또 봐도 재미있었다.공연을 보거나 그림 보는 걸 좋아했던 나는 내가 예술가가 되지 않고 애호가가 됐기 때문에 모든 예술 장르를 즐길 수 있어 더 행복하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난 그날 내가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상기된 표정으로 악보와 지휘자를 번갈아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노래하는 이들에게서 관객은 미처 느낄 수 없는 희열의 폭발음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다. 감상자의 자리는 그저 예술의 옆자리일 뿐이었다.레몬 샤벳 싱어즈는 이제 햇수로 다섯 해가 된다. 어느 해인가 연습 부족을 절감하고는 한 번 공연을 자제한 것을 제외하고는 매해 여름과 겨울에 정기 공연을 했다. 여름에는 직계 가족들만, 겨울에는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도 불러 객석을 채웠다. 작년에는 어버이날 특집으로 디너쇼를 열었다. 멤버 한 사람당 테이블 하나를 배정했는데, 우리처럼 양가 부모님 네 분이 모두 앉아 있는 테이블은 별로 없었다.이제 새치가 희끗희끗한 다 큰 아들, 사위들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시선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공연보다 더 큰 감동이 밀려왔다. 그동안 테너 선생님은 암 진단을 받고 수술차 몇 개월 가르칠 수 없던 때도 있었다. 레몬 샤벳 싱어즈도 새 선생님을 찾지 않고 쉬었다. 처음부터 반주를 맡았던 피아니스트는 5년째 반주를 하고 있다. 마치 막내 여동생을 보듯, 어려운 대학원 시험에 붙으면 함께 축하했고, 사귀던 남자 친구와 헤어져 야위면 모두 가슴 아파했다.여자들의 모성은 아이들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닌가 보다. 남편들의 공연을 보는 마음이란 것이 우리 애들 유치원 때 보았던 발표회 때와 다르지 않았다. 참 기특해 하면서도 다른 사람은 솔로를 하는데 우리 애들 아빠만 솔로가 없으면 괜히 섭섭했다(그런데 올해는 드디어 솔로를 했다). 단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아이들은 참 빨리 느는데 아빠들은 무척 천천히 는다는 것. 그래도 레몬 샤벳 싱어즈 덕분에 3대가 함께 궁금해 한다. 다음 공연에는 어떤 깜짝쇼가 나올는지….국회의원(한나라당)yscho2008@hanmail.net약력: 88년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91년 사법시험 합격(33회). 2001년 미국 컬럼비아대 로스쿨 졸업(법학석사). 2007년 한국씨티은행 부행장. 2008년 제18대 한나라당 국회의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