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의 굴욕

일본의 대표적 가전 회사인 소니가 요즘 풀이 죽어 있다.세계 동시 불황과 엔고라는 이중고로 인해 사상 최악의 적자가 예고된 상태인 데다, 최근 전격적인 사장 교체 인사로 뒤숭숭하기까지 하다. 일본 벤처기업 성공 신화의 상징이었던 소니가 어느새 전형적인 대기업형 경영 부진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1년 전만 하더라도 소니의 실적 호전에 “소니가 부활했다”며 찬사를 보내던 세계 전자 업계는 지금 “소니가 예전의 소니가 아니다”며 차가운 비평을 쏟아낸다. 불황과 엔고라는 외부 요인도 문제지만 덩치가 커지면서 굳어져 버린 고비용 구조와 수년째 히트 상품을 내놓지 못하는 내부 요인이 더 문제라는 지적이다.일부에선 “소니는 규모가 커지면서 톡톡 튀는 특유의 창의성을 잃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소니다움’을 잃고 ‘대기업병’에 걸렸다는 얘기다. 따라서 소니의 위기 극복 열쇠는 ‘소니다움’을 부활시키느냐 여부에 달렸다는 조언이 많다.소니는 브라운관 TV 판매 호조에 안주해 액정표시장치(LCD) TV 개발에 소홀했다가 2000년대 초반 실적 부진으로 고전했다. 그때 사람들은 “이제 소니는 끝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5년 외국인인 하워드 스트링거 회장을 최고경영자(CEO)로 영입하면서 과감한 변신을 꾀해 다시 일어나는 저력을 보였다. 2007년 소니는 3694억 엔의 사상 최대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화려한 부활’이었다.그러나 부활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해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실적은 다시 곤두박질쳤다. 소니는 지난 1월 29일 실적 전망 발표를 통해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 결산에서 사상 최대인 2600억 엔(약 3조9000억 원)의 영업 손실을 낼 것으로 내다봤다. 당기순이익도 1500억 엔 적자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했다. 14년 만에 영업이익과 순이익이 모두 적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게임과 엔터테인먼트 부문의 수익은 그런대로 개선됐지만 매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주력인 LCD TV 등 전자부문의 실적이 급락한 때문이다.소니는 위기 극복을 위해 국내 2개의 TV 공장 중 한 곳을 폐쇄하고 전 세계 사업장에서 1만6000명(정규직 8000명 포함)을 해고하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하기로 했다. 올해 TV 사업 투자액도 당초 계획 4300억 엔에서 3800억 엔으로 줄였다. 스트링거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손실을 봤다”고 고백하고 “경영진으로서 남은 책임은 빨리 대응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소니가 사상 최악의 적자를 낸 것은 세계 동시 불황에 따른 제품 판매 급감과 가파른 엔고로 인한 수익성 악화가 표면적 요인이다. 스트링거 회장은 “원래 지난해 2000억 엔의 영업이익을 예상했지만 갑작스러운 판매 감소와 엔고로 각각 2800억 엔과 600억 엔의 적자 요인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그러나 소니의 진짜 문제는 판매 급감과 엔고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판매 감소와 엔고는 다른 일본 전자 회사들도 똑같이 안고 있는 문제다. 전 세계 다른 경쟁사들의 공통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세계 동시 불황과 엔고라는 이중고도 문제지만 덩치가 커지면서 굳어져 버린 고비용 구조와 수년째 히트 상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한계가 소니의 근본적인 문제다. 한마디로 ‘소니다움’을 잃고 있다는 얘기다.우선 TV 사업의 고비용 구조다. 소니는 브라운관 TV 판매 호조에 안주해 LCD TV 개발에 한발 늦게 참여하는 바람에 LCD 패널을 독자적으로 만들지 못했다. 현재 소니는 LCD 패널을 삼성과의 합작회사에서 주로 공급받고 있다. 최근엔 경쟁사인 샤프로부터도 구매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LCD를 자체 생산하는 삼성이나 샤프에 비해 생산원가가 비쌀 수밖에 없다.물론 삼성과의 합작사로부터는 삼성전자와 똑같은 가격에 LCD 패널을 공급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는 LCD TV부문에서 이익을 내는 반면, 소니는 손해를 보고 있다.그 이유는 소니의 비효율적 사업구조 때문이란 분석이다. 소니는 일본 북미 유럽 아시아 등 각 지역에서 TV 개발과 설계 생산을 각각 담당한다. 개발과 설계 기능 등이 분산돼 있어 인건비 등 고정비가 많이 들어가는 구조다. “TV가 팔리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많이 팔려도 이익이 나지 않는다”(소니 경영진)는 하소연이 나오는 이유다.소니다운 히트 상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소니는 트랜지스터 라디오(1955년 발매) 워크맨(1970년)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1994년) 등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세계 최초’ ‘일본 최초’의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LCD TV에서 박자를 놓친 후 제대로 된 히트 상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미국의 애플은 아이팟 아이폰, 닌텐도는 게임기 DS와 위(Wii) 등으로 히트를 치고 있다.특히 최근 일본 게임기 회사인 닌텐도에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3(PS3)와 플레이스테이션포터블(PSP)이 참패한 건 아픈 대목이다. 2006년 11월 소니는 게임기 PS3를 발표하면서 “PS3는 게임기가 아니다”고 선언했다. ‘셀’이라는 3.2기가바이트 중앙처리장치(CPU)를 탑재한 ‘PS3’는 당시 웬만한 노트북 PC를 능가하는 고성능에 고화질을 자랑했다. 소니는 ‘PS3’가 단순한 게임기가 아니라 거실의 네트워크센터가 되길 기대했다.한 달 뒤 닌텐도는 ‘PS3’의 경쟁 기종인 ‘위(Wii)’를 내놓았다. ‘PS3’에 비해선 성능이나 화질이 한 수 아래였다. 하지만 가정용 게임기를 표방한 ‘위’는 철저하게 ‘즐거운 게임’에 집중했다.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 1~2시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자동차 경주나 볼링 테니스 등을 게임으로 만들었다.그로부터 1년여 뒤인 2007년 말 일본 내 가정용 게임기 시장점유율은 ‘위’ 63% 대 ‘PS3’ 20%였다. 닌텐도 ‘위’의 압승이었다. 이런 승패는 2004년 말 나왔던 휴대용 게임기 닌텐도 DS(점유율 65%)와 소니의 PSP(35%)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그 결과 소니는 2008 회계연도 상반기(4~9월) 게임부문에서만 340억 엔(약 5100억 원)의 영업 손실을 봐 곤혹스러워하고 있다.운명을 가른 건 두 회사가 겨냥한 시장 자체가 달랐다는 점이다. 소니가 게임 마니아들의 수요를 좇아 고성능 고화질에 집착한 데 비해 닌텐도는 기존 고객이 아닌 주부나 중·장년층 등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것이 승패를 갈랐다는 얘기다. 실제 PS3의 경우 마니아용으로 일반인들은 조작조차 쉽지 않은 반면 ‘위’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볼링 게임을 즐길 정도로 쉬운 게임기다.미즈호투자증권의 구라하시 노부 애널리스트는 “소니는 규모가 커지면서 톡톡 튀는 특유의 창의성을 잃었다”며 “소니의 위기 극복은 ‘소니다움’을 부활시키느냐 여부에 달렸다”고 말한다. 어느 기업이나 마찬가지지만 그 기업의 ‘성공 유전자’를 잃어버린 순간이 몰락의 시작이란 사실을 지금의 소니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어쨌든 스트링거 회장은 대수술을 시도하고 있다. 4월 1일자로 주바치 료지 사장을 상담역으로 물러나게 하고 스트링거 회장이 사장도 겸직하기로 했다. 경영 전권을 장악한 스트링거 회장은 4개 사업본부의 책임자 4명 중 3명을 40대 젊은 간부로 발탁하기도 했다.소니 내부적으로는 사장이 단칼에 날아가고 연공서열이 무시된 ‘혁명적인 인사’다. 스트링거 회장은 인사뿐만 아니라 생산체제에도 과감하게 메스를 들이댈 계획이다. 구조적 비효율을 제거해 ‘소니다움’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보여준 것이다. 스트링거 회장의 혁명적 구조조정이 과연 소니의 본래 모습을 되찾게 해줄지 두고 볼 일이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