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오른 녹색 전쟁
중국발 슈퍼 호황이 꺾였다. 갑작스러운 수요 감소로 밤낮없이 쇳물을 토해내던 고로는 멈춰 서고 있다.허리띠를 졸라맨 철강사들은 감원과 감산, 자산 매각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하며 고통스러운 생존 게임에 나섰다.과연 누가 이 위기를 딛고 새로운 강자로 등극할까. 아직 그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위기 이후 세계 철강 업계의 신질서는 ‘그린 코드’, ‘녹색 경쟁력’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철강 기업에 녹색 성장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한경비즈니스는 경제 위기 속에서도 ‘그린 테크놀로지’에 막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글로벌 철강 기업들의 녹색 전쟁 현장을 생생하게 취재해 연재한다.정준양 포스코 회장의 ‘녹색 성장’ 드라이브가 예사롭지 않다. 지난 2월 말 취임한 정 회장은 가장 먼저 조직 개편을 통해 녹색성장추진사무국과 미래성장전략실을 신설했다. 글로벌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포스코의 재도약을 이끌 돌파구를 녹색 성장 전략에서 찾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곧이어 3월 말 남미 우루과이에 유로탤리(EUROTALY)라는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계열사로 편입했다. 해외 조림을 통해 탄소 배출권을 확보하는 신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이 회사는 현지에서 2만ha의 목초지를 매입해 30년간 나무를 키우는 조림 사업을 담당하게 된다. 이를 통해 확보한 탄소 배출권은 국내 공장의 증산 등에 활용할 수 있다. 포스코의 해외 조림을 통한 배출권 사업은 국내 최초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앞선 것이다.이뿐만 아니다. 포스코 그룹의 환경 기술 역량이 집약된 포스타워도 최근 문을 열었다. 포스코 계열사인 포스콘과 포스에이씨가 서울 역삼동에 지은 이 건물은 친환경 건축 소재인 스틸을 전면에 적용하고 외벽에 박막형 태양광발전 시스템을 채택해 연간 4만2500kwh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또 발광다이오드(LED) 전력 절감형 조명 시스템을 국내에서 처음 건물 내·외부 전면에 설치하는 등 전체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을 연간 160톤가량 저감한다.지난 3월 31일 열린 창립 41주년 기념식의 핵심 키워드도 ‘환경’이었다. 정 회장은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 철강을 만들어 온 사명을 승화 발전시켜 지금보다 더 깨끗한 에너지로, 인류의 생활에 꼭 필요한 물자와 서비스를 알뜰하게 제공하는 ‘녹색 기업 포스코’로 자리 매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행사는 ‘탄소 저감형’으로 기획돼 눈길을 끌었다. 차량 운행을 최소화하고 행사로 발생한 이산화탄소를 흡수할 수 있도록 임직원들이 따로 2000여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정 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생활양식의 변화까지 이야기한다. 자전거 타기나 생활쓰레기 줄이기, 금연 운동 같은 작은 일에서부터 자발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익숙한 틀을 버리고 환경을 중심에 놓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것을 바꾸라는 강력한 주문이다. 대표적인 에너지 다소비 업종이자 2002년 이후 초호황을 누려온 철강 기업 포스코가 이처럼 사활을 걸고 녹색 성장이라는 화두에 매달리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하지만 해외로 눈을 돌리면 새로운 변화의 물결은 뚜렷하다. 세계 철강 업계의 ‘녹색 전쟁’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동안 기후변화 논의에서 한발 물러나 있던 미국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세계 1위 경제 대국 미국이 채택하는 환경 정책은 향후 철강을 포함한 세계 산업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미국은 현재 추진 중인 미국 내 온실가스 배출 제한 제도를 도입한 이후에는 온실가스 부담금을 부과하지 않는 나라의 수입품에 대해 보복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오바마 대통령은 각종 규제를 법제화해 2050년까지 미국의 온실가스 배출을 1990년 대비 80% 이상 감축한다는 목표를 세워 놓고 있다. 하지만 철강과 제지, 시멘트 등 에너지 다소비 업종 기업들은 무리한 규제가 미국 기업의 경쟁력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온실가스 보복관세는 이런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조치인 셈이다. 온실가스 문제가 언제든 새로운 통상 분쟁으로 비화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세계의 공장’이자 철강 붐의 진원지인 중국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금 중국 대륙에서는 철강 기업의 인수·합병(M&A)이 숨 가쁘게 진행 중이다. 이에 따라 글로벌 철강 기업 순위도 요동치고 있다. 2007년 세계 철강사 순위는 아르셀로미탈(1위), 신일철(2위), JFE(3위), 포스코(4위), 바오산철강(5위) 순이었다. 하지만 현재 집계 중인 2008년 순위는 기존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아르셀로미탈이 1위를 유지하지만 2위는 1년 사이 닝보철강, 바오베이철강, 광저우철강 등을 인수해 몸집을 키운 바오산철강이 차지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당산철강과 한단철강의 합병으로 탄생한 허베이철강도 최소 4위에 이름을 올릴 것으로 보인다. 반면 지난해 하반기부터 대규모 감산에 들어간 신일철, JFE 등 일본 철강사들은 순위 하락이 불가피하고 포스코도 마찬가지다.중국 정부가 지난해부터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철강 산업 대형화 정책이 서서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중요한 것은 이러한 M&A를 통한 대형화가 단순한 외형 키우기 차원에서만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은미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중국은 대형화와 함께 환경오염의 주범인 노후 설비와 낙후된 공장을 폐쇄하는 정책을 수년째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산화탄소 배출 대국이란 오명을 가져다 준 낡은 군소 철강사들을 빠르게 통폐합하면서 녹색 성장 시대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세계 철강 업계에 온실가스 규제는 엄청난 도전이다. 미래 세대를 위해 지구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당위이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온실가스 중 철강에서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산화탄소(CO₂)다.인간이 처음 철을 다룰 수 있게 것은 수천 년 전이지만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고 철광석에서 쇳물을 뽑아낼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없다. 이산화탄소 배출 규제가 철강 업체들에는 생사를 가르는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쇳물을 생산하는 제철소의 고로 안에서 복잡한 화학반응이 이뤄지는데 이를 단순화하면 산화철(FeO)에 탄소(C)나 일산화탄소(CO)를 가해 철(Fe)과 산소(O)로 분리해 낸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때 분리된 산소(O)는 탄소(C 또는 CO)와 결합해 이산화탄소(CO₂)가 된다. 자연 상태에 산화철 형태로 존재하는 철을 순수한 형태로 뽑아내기 위해서는 이산화탄소 배출이 불가피한 것이다.또한 각 나라마다 철강 산업이 갖는 의미도 큰 차이가 난다. 2000년 이후 철강 소비가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곳은 중국 인도 러시아 등 신흥시장 국가들이다. 경제발전의 초기 단계에 있는 이들 나라는 건물을 세우고 사회 기반 시설을 갖추며 공장을 돌리기 위해 엄청난 양의 철강을 소비하고 있다. 지난 2003~06년 중국의 철강 생산량은 무려 90.1% 증가했다. 러시아 역시 같은 기간 철강 생산량이 15.1% 증가했다. 반면 미국(5.2%)과 일본(5.2%), 한국(4.8%)은 소폭 늘어나는데 그쳤다.간단히 말해 신흥시장 국가들의 철강 수요는 매년 급증하는데 반해 경제발전이 일정 궤도에 오른 나라에선 수요가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오히려 감소한다. 이는 신흥시장 국가들의 경우 다소의 희생을 치르더라도 철강 생산을 늘리는 데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환경 기술의 수준도 나라마다 편차가 크다. 에너지 다소비 업종이라는 약점 때문에 철강 업계는 일찍부터 에너지 효율 개선에 많은 투자를 해 왔다. 세계 철강 산업의 에너지 효율은 1973~2000년 약 80% 개선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운송, 건설 등 다른 산업 분야를 훨씬 앞지르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철강 산업의 에너지 효율 개선이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철광석에서 쇳물을 뽑아내는 환원 과정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더 이상 효율 개선의 여지가 없을 만큼 각 공정이 최적화돼 있다는 것이다.국내 철강 업계의 에너지 효율은 세계 선두권이다. 조강 1톤 당 에너지 소비량(원유 톤)을 기준으로 보면 일본(0.59)이 가장 앞서 있고 한국(0.63)이 근소한 차이로 2위다. 독일(0.69)이 그 뒤를 잇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은 이보다 훨씬 뒤처진다.그러나 온실가스 규제가 국내 철강 업계에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아 보인다. 오히려 최근 ‘포스트 교토체제’ 논의를 보면 상황은 정반대로 흐르고 있다. 안윤기 포스코경영연구소 환경자원에너지그룹장은 “한국이 새로운 규제의 주타깃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현재 자신들만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지는데 불만을 갖고 있는 선진국들은 포스트 교토체제에선 중국 등 개발도상국을 반드시 의무 규제 대상에 집어넣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만한 것이 바로 산업 섹터제(Sectoral Approach)다. 국가 단위 총량 규제와는 별도로 같은 업종의 전 세계 기업을 하나의 단위로 보는 접근 방식이다.이럴 경우 철강 조선 반도체 등 몇몇 업종의 글로벌 대표 기업을 갖고 있는 한국은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중국은 개발도상국으로 규제 대상에서 빠져나가고 한국만 남게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현재 포스트 교토체제에 대한 세계 철강 업계의 입장은 2007년 12월 국제철강협회 결의에 잘 담겨 있다. 핵심은 △산업 섹터제 △자발적 감축 △원단위 방식 △기술 지향 등으로 정리된다. 산업 섹터제는 현재 교토체제에서 시행되고 있는 온실가스 총량 규제 및 거래(Cap and Trade) 방식의 문제점에서 출발한다. 각 국가별 온실가스 배출 총량을 할당하고 규제하는 기존 방식은 공해 유발 공정의 지역적 이동만을 가져 왔을 뿐 근본적인 해법은 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를테면 유럽 철강사들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제선, 제강 공정을 동유럽으로 이전해 슬래브 형태로 중간 생산물을 가져오려고 한다.또한 국가 단위 총량 규제는 에너지 효율이 가장 높은 철강사와 최악인 철강사를 똑같이 규제한다. 국제철강협회는 에너지 효율이 높은 철강사에는 증산 기회를 허용하는 방식의 규제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철강은 여전히 한 나라의 경제성장에 필수적인 소재이기 때문이다. 이때 유용한 것이 바로 원단위 비교다. 기존 총량 방식이 특정 국가 또는 기업에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의 총량을 따진다면 원단위 방식은 이를테면 조강 1톤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측정하는 것이다. 이는 생산 과정의 에너지 효율성이 높고 환경 친화적인 철강사에 유리하다.‘위기 이후’를 준비하는 세계 철강 업체들의 또 다른 화두는 ‘에코 스틸(Eco Steel)’이다. 자동차, 전기전자, 에너지 등 철강 수요 산업의 환경 관련 니즈를 적극 수용해 이를 제품화하는 전략이다. 기존 제품에 피해 훨씬 가볍고 단단한 고강도 강판은 자동차의 중량을 감소시켜 에너지 소비, 즉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 준다. 하이브리드 자동차용 모터에 들어가는 고효율 전기 강판도 마찬가지다.취재=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협찬= POSCO©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