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배 아모레퍼시픽 사장 4시간 밀착 인터뷰

좀처럼 언론에 모습을 보이지 않기로 유명한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사장. 그런 서 사장과 가까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후배 사랑’ 덕분이었다. 연세대 경영대학은 동문들 중 유명 인사 80여 명을 1학년 학생들의 멘토(mentor: 인생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로 맺어주는 프로그램을 지난해부터 시작했다.멘토로 초청된 인물들 중에서 서 사장은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연세대 경영대 측은 “멘토링 프로그램을 알리기 위해 서 사장의 멘토링 활동을 홍보하겠다고 제안했고, 서 사장은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고 설명했다. 인터뷰는 멘토링 활동에 초점을 맞춰 진행했지만 이를 통해 서 사장의 학창 생활, 성격, 인생관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지난 3월 28일 토요일 오후, 연세대 경영대학 강당에서는 멘토링 프로그램 출범식 행사가 한창이었다. 오후 4시 30분, 동문들의 입장 순서에 앞서 도착한 서 사장은 1년 만에 만나는 동문들과 인사를 나눴다. 짬을 내 질문을 던져보았다.“멘토로 참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요?” “학교에서 요청이 와서요.” “멘토로 참여하니 어떻습니까?” “재밌어요.” “언론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잘 못하니까.”질문 하나하나에 답변을 술술 쏟아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생각은 분명히 나타냈다. 기자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행사 입장 시간이 다가왔다.말뿐만 아니라 때로는 패션이 그 사람을 말해 준다는 말도 있다. 겉으로 말을 많이 하기보다 내실을 기하겠다는 서 사장의 스타일은 그의 패션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렇게나 입은 듯 평범해 보이지만 군살 없는 몸매에 헐렁하지도 타이트하지도 않은 셔츠, 재킷, 바지에서 한 치의 틈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재킷의 행커치프, 스티치가 들어간 가죽 벨트, 깔끔한 캐주얼 구두, 그리고 범상치 않은 시계는 절제해야 할 부분과 강조해야 할 부분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공식 행사가 끝난 뒤 선배들과 후배들은 신촌 ‘거구장’으로 옮겨 식사를 겸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선배 3명과 후배 10명이 짝이 돼 한 조를 이뤘다. 기자에게 서 사장은 “젊은이들의 생각을 듣는 것이 새롭다. 우리 때와는 참 다르다”며 멘토 참여에 대한 소감을 들려줬다.서 사장은 후배들에게 돌아가며 장차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어 보았다. 컨설팅 업체, 금융권, 예술 경영 등 다양한 방면으로 진출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친절하게 업계의 특성과 전망을 조언해 줬다. 특히 디자인 경영에 관심이 많다는 학생에게는 “디자인은 단순히 예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화장품 용기의 경우 예쁜 것은 기본이고 손에 잘 잡혀야 해요. 또 깨지지 않아야 하고, 공장에서 생산이 가능해야 하고, 소비자의 눈에도 잘 띄어야 합니다. 예쁘다는 것이 내 눈에 예뻐서 되는 게 아니라 소비자들의 눈에 예뻐야 돼요. 자기 눈에만 예쁘게 하려면 혼자 작업하는 작가가 돼야죠”라며 본인의 생각을 들려주었다.여학생들에게는 “요즘에는 여성들의 활약이 대단하다”며 “우리 회사에도 여성들이 절반이 넘는다”며 용기를 북돋우는 동시에 “여성들이 임원·상무 등 ‘2서클’까지는 많이 있는데, 사장·부사장의 ‘1서클’까지는 아직도 접근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것을 깨야 한다”며 도전 정신을 일깨우기도 했다.이어 서 사장은 “인생에서는 ‘무슨 일을 하느냐’와 ‘누구와 사느냐’, 이 두 가지만 성공하면 된다”며 ‘직장’보다는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직업’을 생각하라고 조언해 줬다. 이때 기자가 “사장님께서는 어떻게 지금의 직업을 갖게 됐습니까”라고 물어보았다.“제 위에 형과 누나들도 있었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뭔가 만드는 것이 재미가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금의 일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서 사장은 아모레퍼시픽(옛 태평양) 창업주 고 서성환 회장의 2남 4녀 중 막내로, 형은 태평양개발의 서영배 회장이다. 서 사장은 현재의 일에 만족하느냐는 물음에 “만족한다”고 답했다.‘누구와 사느냐’를 얘기하다 보니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미팅’으로 흘러갔다. 서 사장은 대학 때 7번 미팅을 했고, 그중 한 여학생과 자주 만났다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가 없어서 연대 앞 ‘독수리다방’이나 이대 앞 ‘그린하우스’ 게시판에 먼저 온 사람이 어디로 오라는 메모를 남겼다”며 “여학생의 부모님이나 오빠가 전화를 받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서로 몇 시에 전화할지 정해 놓고 한 시간 전부터 전화기 앞에 앉아 그 시간을 기다렸다”며 추억을 되새겼다.고2, 중1의 두 딸을 두고 있는 서 사장의 다정다감한 ‘딸 사랑’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젠 큰딸에게 칵테일을 만들어 줬다”는 서 사장에게 “고교생인데 술을 줬나요?”라고 묻자 그는 “대신 다른 데서는 마시지 말라고 다짐을 받았지요”라며 웃으며 답했다. 딸에게 직접 칵테일을 만들어 주는 아빠라니, 로맨틱하지 않을 수 없다.81학번인 서 사장은 “1학년 때 어두운 시국 상황으로 휴교가 잦을 때 책을 많이 읽었다”며 학생들에게도 “무슨 일을 하든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추천할 만한 책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조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때는 ‘전환시대의 논리’과 같은 책들을 읽었는데, 지금의 신입생들에게는 지금 상황에 맞는 좋은 사회과학 책들이 많을 겁니다.”‘능력’과 ‘자세’에 대한 얘기도 있었다. “능력보다는 자세를 보고 뽑는 회사가 많습니다.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르치면 되지만 자세가 나쁜 사람은 방법이 없습니다.” 아모레퍼시픽에 입사하려는 젊은이들이라면 참고할 만한 말이다.두 시간 반 뒤, 서 사장이 자리를 마무리하고 떠나려는 찰나, 잠깐 여유가 생겨 몇 가지 추가 질문을 던졌다.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지난해 불황에도 불구하고 아모레퍼시픽의 매출과 영업이익이 늘었습니다. 불황에는 립스틱이 잘 팔린다는 얘기가 정말인가 봅니다.” “실제로 립스틱 구입 비중은 크지 않고요, 불황·호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객을 잘 이해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물론 화장품도 불황의 영향이 있습니다.” 고객 충성도 높은 제품 위주의 라인업이 불황을 비켜간 비결이라는 얘기였다.“북한은 개인적으로 아버지의 고향(황해도 평산군)이라 관심이 있습니다. 길게 보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어린이들에게 잘해 줘야 합니다. 지난 5년 동안 북한에는 어린이 프로그램만 지원했습니다.”“제가 하는 일은 주로 여성과 관련된 일입니다. 여성에 관심을 가진 것은 제 할머니 때문입니다. 할머니께서 일을 하시면서 아버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고 저도 그것을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여성의 사회 활동에 관심이 많습니다.”서 사장의 할머니인 윤독정(1891~1959) 여사는 가내수공업으로 화장품을 제조해 가족의 생계를 꾸렸고, 그녀의 아들인 서성환 회장은 이를 바탕으로 화장품 회사를 일구어 낼 수 있었다.이날 서 사장은 여러 사람들이 권하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마셨다. 특히 젊은 후배들과의 시간이 만족스러운 듯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다. 오후 8시 30분쯤 행사가 마무리되자 서 사장은 환하게 웃으며 참석자들과 악수한 후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거구장’을 떠났다. 4시간의 밀착 인터뷰도 이쯤에서 마무리됐다.1963년생.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미 코넬대 경영대학원 졸업. 87년 태평양화학 과장. 92년 태평양제약 사장. 97년 태평양 대표이사 사장. 2006년 아모레퍼시픽 대표이사 사장(현).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