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대 오른 러시아의 통제력
‘끗발’ 좋은 중앙정부의 관리가 지방에 내려가 목에 힘주던 시절은 역사책에서나 나오는 얘기가 됐다.오히려 중무장한 사실상 군대 수준의 지방 조직에 납치돼 ‘파리 목숨’이나마 부지하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중앙정부 관리에 대한 납치와 살해 협박은 어쩌다 한 번 터지는 일이 아니라 이제 ‘일상’이 돼 버렸다.예전 같으면 전쟁이나 무력 진압도 불사했을 법한 중앙정부는 ‘좋게 좋게’ 지방 세력과 타협해 넘어가려고만 한다. 바로 체첸과 다게스탄, 잉구세티야 등 카스피해 연안지역에서 힘이 떨어진 러시아 얘기다.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경제 위기로 인해 러시아가 국토의 변방에 있는 지방자치공화국들에 대한 통제력이 시험대 위에 올랐다고 보도했다.FT는 지난 2월 러시아에서 카스피해 연안 다게스탄으로 파견된 러시아 세무공무원 등이 중무장한 다게스탄 지방 정권과 지방은행 사병들에 의해 납치돼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고 보도했다.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중앙정부 관리들의 통제가 다게스탄에선 거의 집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 관리들에 대한 ‘생명의 위협’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게스탄 지방정부와 러시아 중앙정부 간엔 큰 문제 없이 현상이 유지되는 것으로 전해졌다.다게스탄에선 지난 2월 러시아 중앙정부의 세무 관리인 블라디미르 라드셴코가 다게스탄에 파견됐다가 납치되는 곤욕을 치렀다. 라드셴코를 납치한 세력은 바로 다게스탄 지방정부 대통령의 아들로, 그의 경호원들은 권총으로 중앙정부 관리를 위협해 “이 땅을 떠나라”고 협박했다. 라드셴코는 풀려난 뒤 다시 다게스탄으로 일하러 들어갔고 이번에는 사무실에서 다게스탄 중앙은행이 고용한 ‘중무장’한 갱단의 집단 위협을 받고 은신할 수밖에 없었다.이런 사태에 대해 다게스탄 지방정부는 “총기 발사 사고는 없었다”거나 “아무도 죽지 않았다”며 아무런 조치 없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러시아 중앙정부의 반응도 ‘미지근’하다. 무크후 알리에프 다게스탄 대통령은 잇단 사고 발생에도 불구하고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푸틴 총리 등을 잇달아 만나며 건재를 과시했다.이 같은 현상에 대해 마샤 리프먼 미국 카네기 모스크바 센터 연구원은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고위 관리들이 납치되곤 하는데 다른 나라 같으면 큰 문제가 됐겠지만 러시아에선 위기에 끼지도 못한다”고 평했다.시차가 11시간이나 나는 광대한 영토를 지닌 러시아에서 중앙정부가 언제나 중앙집중화된 권위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설명이다.블라디보스토크나 무르만스크 지역 등에선 분쟁이 발생하면 무력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무슬림 인구가 다수인 캅카스 산맥 근처 다게스탄처럼 취약 지역에선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는 게 FT의 분석이다.다게스탄과 체첸, 잉구세티야 등 카스피해 연안국들에 대해 러시아는 평소 중앙정부의 자금 지원으로 지역을 장악해 왔지만 경제 위기로 지역 내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다.역사적으로 이들 지역은 러시아에 대한 독립 의지가 강해 강력한 반란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었지만 소련 정권 수립 이후엔 역설적으로 러시아의 자금줄에 의존하는 지역이 됐다는 것.분리 독립 움직임을 강력하게 진압하며 쑥대밭을 만든 체첸 지역을 다스리는 방법도 자금력이었는데 이제 그 카드를 계속 사용하기 힘들어졌다.결국 러시아는 이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돈’을 무기로 활용해 왔지만 경제 위기로 돈줄이 끊기자 오히려 지역 내 분란에 기름을 끼얹고 있는 형국이다. 종교와 인종 등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지역에서 지역을 안정시켜 오던 중앙정부의 자금력이 사라지면서 각종 긴장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는 설명.이와 관련, 캅카스 지역 전문가인 알렉세이 말라셴코는 “캅카스 북부 지역에는 자생력 있는 경제력이 없고 오직 모스크바가 지원하는 돈에만 의지하고 있는데 이 돈이 끊긴다면 다게스탄과 체첸, 잉구세티야에선 폭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김동욱·한국경제 기자 kimdw@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