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동걸린 위안화의 국제화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경제구조를 지탱해 온 ‘팍스 달러리움(pax dollarium: 달러가 주도하는 세계경제 질서)’이 공격을 받고 있다. 미국의 수뇌부는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 사수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달러 공격에 나선 중국은 기축통화의 변화를 장기전으로 본다. 첫 무대로 4월 2일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선택됐다. 이를 기점으로 기축통화를 달러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SDR)으로 대체하기 위한 통화대전(通貨大戰)의 대장정을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의 의도는 먹히는 듯하다.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IMF 총재는 “새 통화에 대한 논의가 극히 적절하다고 생각한다”며 몇 달 내에 이런 논의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달러 기축통화 퇴출 작전= 중국의 달러 공격 선봉은 인민은행장인 저우샤오촨이 맡았다. 그는 3월 23일 저녁 인민은행 홈페이지에 기고한 ‘국제통화 개혁에 대한 생각’이라는 글에서 “특정 국가의 통화가 기축통화 역할을 하면 그 국가의 국내 통화 정책상의 필요와 다른 나라의 요구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며 기축통화를 미국 달러에서 초국가적인 국제통화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직접 미국 달러를 거론하지 않았지만 최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발권력을 동원해 1조1500억 달러의 금융 부실 해소 자금을 공급하기로 한 데 대한 비판으로 분석된다.중국은 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에 대해 끊임없이 위협적인 발언을 해 오고 있다. 중국은 작년 10월 24일 공산당 기관지 런민르바오 논평을 통해 “음울한 (금융 위기) 현실 속에 사람들은 미국이 달러화의 지배적 지위를 이용해 세계의 부를 착취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며 “이제 세계는 국제경제에서 미국이 점해 온 지배적 지위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달러에 대한 공격을 선언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며칠 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와 만난 원자바오 총리는 “지금은 국제금융 인프라를 개편할 최적기”라며 “다양한 통화 사용을 통해 국제통화 시스템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금융 위기 해결을 위한 1차 G20 정상회의에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국제통화를 다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달러 기축통화 퇴출 작전이 주도면밀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위안화 기축통화 행보= 저우 행장의 달러 공격은 위안화를 기축통화의 반열에 올리기 위한 통화 전쟁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저우 행장이 “(달러 유로 엔화 파운드로만 구성돼 있는) SDR에 국가별 경제 규모를 반영해 모든 주요 경제국 통화들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한 것은 세계 3위 경제 대국인 중국의 위상을 새로운 세계 공용의 슈퍼 통화에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는 지적이다. 미국발 금융 위기로 중국의 위안화 국제화 행보가 가시화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실제 중국은 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 다른 국가들과의 통화 스와프 체결을 늘려가고 무역 결제 때도 위안화를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작년 12월 한국과 1800억 위안(약 39조6000억 원) 규모의 통화 스와프를 체결한 게 신호탄이다. 중국은 한국과 10년 전에도 통화 스와프를 체결했지만 이번에 한 것은 달러 대신 위안화를 처음으로 통화 스와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이후 이뤄진 홍콩(2000억 위안) 말레이시아(800억 위안) 벨라루스(200억 위안) 인도네시아(1000억 위안)와의 통화 스와프도 위안화를 기본으로 하고 일부 달러를 제공하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홍콩의 행정 수반인 도널드 창 행정장관이 저우 행장의 기축통화 교체 촉구 발언 하루 뒤인 3월 24일 달러 페그제 포기를 처음 시사하는 발언을 한 것은 달러를 기축통화에서 밀어내겠다는 중국의 의도에 호응하겠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그는 이날 “홍콩 달러를 위안화와 연계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홍콩을 위안화 기축통화의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중국의 의도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983년 이후 달러당 7.80홍콩 달러를 기준으로 일정 범위 내에서만 환율 변동을 허용해 온 홍콩 당국자의 발언으로는 이례적이라고 분석했다.물론 전제를 달았다. “매우, 매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위안화가 (자본 거래에서도 자유롭게 환전이 이뤄지는) 완전 자유 태환이 이뤄질 때”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면 언제가 될까. 그 시점을 유추할 수 있는 중국 정부의 새로운 계획이 3월 25일 발표됐다. 중국 국무원(중앙정부)은 이날 원 총리가 주관한 상무회의에서 상하이를 오는 2020년까지 국제금융센터로 건설하겠다는 계획안을 심의했다. 그러면서 중국의 경제 수준과 위안화의 국제 위상에 걸맞은 국제금융센터라는 조건을 달았다. 일각에선 2020년까지 중국이 기본적인 위안화 자유 태환을 실시해 위안화를 기축통화의 반열에 올리겠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위안화의 기축통화 행보가 낙후된 중국의 금융 산업 육성과 맞물려 돌아갈 것임을 예고한다.◇브릭스 중심 연합군 확대= 달러에 대한 공격 선봉에 중국만 있는 건 아니다. 저우 행장의 성명이 발표되기 1주일 전 러시아는 크렘린궁 성명을 통해 “IMF가 새로운 기축통화를 발행해 달러를 대체해야 하며 이것이 4월 2일 런던에서 열리는 2차 G20 정상회의의 핵심 의제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 외화보유액 1위와 3위인 중국과 러시아의 연이은 달러 공격은 이번 G20 정상회의에 대한 신흥국의 입장 정리를 위해 3월 초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 등 브릭스 4국 관계자가 회동한 직후 이뤄졌다. 로이터통신은 이 회동에서 중국은 이미 기축통화를 달러에서 SDR로 대체하는 방안을 회람시켰다고 보도했다. 새로운 기축통화 방안에 인도는 반대를 표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러시아 정부의 관계자는 한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도 새 기축통화 방안을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브릭스를 중심으로 달러를 공격할 연합군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물론 반발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저우 행장의 성명이 나온 지 하루 뒤 미국의 수뇌부들이 총출동해 “새로운 기축통화는 필요 없다”고 반박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달러가 지금 아주 튼튼한 것은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 대국이자 가장 안정된 정치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미국에 대한 전 세계 투자자들의 신뢰가 있기 때문”이라며 “새로운 기축통화는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물론 중국과 러시아도 달러를 기축통화에서 끌어내리는 게 단시간 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민은행은 “국제적으로 널리 통용될 새 기축통화가 새로 자리를 잡으려면 환율 평가 기준이 안정되기까지 긴 시간이 소요된다”며 “이를 위해서는 IMF의 자금을 더 확충해야 하는 등 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SDR(특별인출권: Special Drawing Rights)1969년 국제통화기금(IMF) 워싱턴회의에서 도입이 결정된 가상의 국제준비통화. 미국이 기축통화인 달러를 무제한 공급할 경우 경상수지 적자가 확대되는 문제가 있어 새로운 통화를 만들 필요성이 제기돼 채택됐다. 1SDR는 5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통화를 가중평균해 산정하며 현재 약 1.5달러 수준이다. IMF 회원국은 일정 규모의 SDR를 출연하고 경제가 어려워지면 SDR를 배분받아 사용한다.오광진·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joh@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