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장푸는 부품·소재 시장

도요타자동차는 지난 1월부터 한국의 포스코로부터 자동차 내부용 도금강판을 납품받기 시작했다. 포스코는 그동안 일본의 다른 자동차 업체엔 강판을 팔았지만 유일하게 도요타에만 공급하지 못했다. 일본 자동차 회사 중 품질 기준이 특히 까다로운 도요타는 신일본제철 강판만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요타가 작년 말부터 마음을 바꿔 포스코 강판을 주문했다.계기는 2008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에 4500억 엔(약 6조75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최종 손실 전망이었다. 도요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최악의 경영 실적 때문에 최근 공장 화장실 휴지를 아낄 정도로 원가 절감에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그런 마당에 신일철 강판보다 5% 안팎 싼 포스코 강판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포스코 강판의 품질은 신일철 제품과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의 부품·소재 시장이 한국 기업에 조금씩 문을 열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발이 닳도록 찾아가 부품 설명서를 돌려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일본 기업들이 지금은 제 발로 찾아오고 있다. 세계 동시 불황에 엔고까지 겹친 이중고로 대규모 적자에 직면한 일본 기업들이 원가 절감을 위해 일본산보다 싼 한국 부품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물론 가격이 싸기 때문만은 아니다. 싼 것만 따지면 중국산이 더 저렴하다. 그러나 중국 부품은 신뢰도가 낮다는 게 약점이다. 중국산에 비해 품질이 우수하고 일본산에 비해선 가격이 싼 게 요즘 한국 제품의 특징이다.일본의 가전 회사인 소니와 샤프의 경영진은 ‘가급적 한국 부품 조달을 늘리라’는 지침을 최근 부품 구매 부서에 통보했다. 핵심 부품이 아닌 범용 부품은 몇 엔이라도 싸면 한국산을 쓰라는 지시였다. LG재팬 관계자는 “샤프의 경우 액정표시장치(LCD) TV에 들어가는 편광확산필름 등 화학제품의 구매의사를 밝혀 왔다”며 “작년까지는 우리 쪽에서 매달려도 안됐는데 스스로 태도를 바꿨다”고 말했다.소니는 TV 등에 들어가는 표면처리강판 2만 톤 정도를 포스코로부터 구입할 예정이다. 포스코가 소니에 강판을 판매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최대 가전 메이커인 파나소닉(옛 마쓰시타전기)도 그동안 일본에서만 조달하던 LCD 패널용 백라이트와 시트 등 부품을 LG이노텍과 LG화학 등에서 조달하는 것을 검토 중이다. 도시바는 휴대전화의 일부 자재를 한국에서 구입하기 위해 관련 업체와 접촉 중이다. 미쓰비시전기도 가전제품 포장용 종이 박스와 볼트 너트 고무 패킹 절연재 등을 한국에서 조달하기로 결정하고 최근 구매 담당자가 상담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삼성재팬 관계자는 “일본 기업들은 전통적으로 부품 조달에 자국 업체를 최우선으로 고려했지만 엔고로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 글로벌 소싱을 확대하고 있다”며 “가장 큰 수혜를 한국 기업들이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산 LCD TV나 휴대전화 등이 세계시장에서 인정받고 있는 만큼 거기에 들어가는 부품의 경쟁력도 간접적으로 인정받는 덕이 크다.한국 기업들과 KOTRA는 일본 부품·소재 시장에서의 역샌드위치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전략이다. 삼성 LG 등은 기존 거래 기업에 대해선 부품 공급을 늘리는 한편 신규 거래처를 발굴하기 위해 일본 전자·전기 업체들과의 접촉을 늘리고 있다.KOTRA 도쿄무역관은 한국 부품 구입을 희망하는 일본 기업 40여 개사를 모아 4월 중순 서울에서 ‘역견본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역견본전시회는 일본 기업이 원하는 부품의 세부 사양과 견본을 전시하고 공급이 가능한 한국 부품 기업들과 상담을 벌이는 행사다. 또 오는 9월엔 도요타자동차의 나고야 본사에서 한국의 자동차 부품업체 50여 개사가 자신들의 부품을 설명하고 상담을 벌이는 행사도 열 계획이다.LG이노텍의 한용택 일본사무소장은 “일본 제조업체가 부품을 구입할 때 요구하는 시험 평가 데이터와 품질 기준 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고 까다롭다”며 “그런 벽을 넘어 실제 부품을 납품하는 과정에서 품질관리 시스템 등 배우는 게 많다”고 귀띔했다. 일본 기업에 대한 부품 공급 자체가 한국의 부품 경쟁력을 한층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역샌드위치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건 부품·소재뿐만 아니다. 완제품 시장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사실 일본의 가전 시장은 한국 기업들엔 철옹성이었다. 한때 삼성전자 LG전자 등이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 백색가전 시장을 공략했지만 한 뼘의 시장도 차지하지 못하고 2006년 모두 철수했다. 일본 경쟁 제품의 품질이 워낙 뛰어난 데다 유통구조도 외국 기업에 불리해 난공불락이었던 때문이다. 지금은 백색가전 중에선 LG전자가 유일하게 세탁기를 팔고 있을 뿐이다.그러나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을 것 같던 일본의 가전 시장에도 변화의 조짐이 엿보인다.서울의 용산전자상가와 같은 도쿄 아키하바라에 있는 가전제품 양판점인 요도바시카메라 3층엔 요즘 선물용 등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전자액자 코너가 있다. 여기엔 소니 후지필름 코닥 LG전자 등 각국의 13개 전자업체 제품들이 즐비하게 진열돼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단연 한국의 LG전자 제품이다. 매장의 다카하시 기이치(24) 점원은 “하루에 10개의 전자액자가 팔린다면 그중에 4~5개는 LG제품”이라고 말했다.LG의 전자액자가 인기를 모으는 것은 기능이 뛰어난 데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사진뿐만 아니라 동영상도 보여주는 기능을 갖춘 LG 전자액자 가격은 1만9800엔(약 29만7000원). 동영상 기능이 없는 소니 제품이 1만9300엔인 것에 비하면 분명 경쟁력이 있다. 1만7000엔대의 대만 제품도 있긴 하지만 기능이나 브랜드 인지도 측면에서 LG에 상대가 안 된다.또 일본 가전 시장에서 판매가 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세탁기다. LG전자의 일반 세탁기는 요도바시카메라에서만 지난 1월 중 판매량이 전년 동기의 3배를 넘었다.예컨대 5kg 용량 일반 세탁기 경우 LG 제품 가격은 2만3000엔인데 비해 일본 파나소닉 제품은 3만 엔이 넘는다. 요도바시카메라 관계자는 “불황으로 일본 소비자들도 호주머니가 가벼워져 저렴한 제품을 선호한다”고 말했다.삼성전자와 LG전자의 휴대전화도 일본 시장에서 잘나가고 있다. 현재 삼성은 소프트방크, LG는 NTT도코모 등 휴대전화사업자에 휴대전화를 공급한다. 물론 소프트방크와 NTT도코모는 한국 기업 외에도 파나소닉 샤프 NEC 후지쯔 등 내로라하는 일본 기업들로부터도 동시에 휴대전화를 공급 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 엔고-원저로 인해 한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강해지면서 삼성 LG에 주문이 늘고 있다.이규홍 LG재팬 사장은 “최근 역샌드위치 효과로 인해 얻는 수익은 모두 품질 개선과 마케팅 등에 재투자할 방침”이라며 “그를 통해 세계 최고 품질의 시장인 일본에서 뿌리를 내리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중·장기적으로는 일본에서 한국 제품의 브랜드 이미지를 고급화해야 한다”며 “가전제품의 경우 일본에서만 생존하면 다른 나라 시장 공략은 훨씬 쉽다”고 설명했다.주일한국대사관의 김경수 상무관은 “엔고-원저에 따른 한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은 일시적일 수 있다”며 “지금의 역샌드위치 효과를 한국 부품·소재의 품질 경쟁력을 높이고 제품의 브랜드 이미지를 일본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키는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