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술에 찌든 농사꾼이었다. 가족이라곤 단출하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 단 3명이었지만 아버지의 술 때문에 즐겁던 기억이 별로 없다. 술에 취한 아버지의 일장 연설과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너무 싫어 가끔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솔직히’ 한 적이 있다.그러던 아버지가 2년 전 오랜 투병 끝에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이젠 안 계신데, 가끔 아버지를 떠올리면 너무 아쉽고 그리워진다. 술 한잔 제대로 사드리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곤 한다. 그 지긋지긋했던 술을, 지금 사드리지 못했던 게 후회가 되는 것은 아마도 소주가 달지만은 않다는 걸 이제 알았기 때문이리라.특히 쌀쌀한 날 새벽에 출근을 서두를 때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서울에 올라와 이것저것 해보다 결국 모두 실패한 아버지는 막노동을 했다. 매섭게 추웠던 어느 겨울 새벽, 밖은 아직 캄캄했지만 인력시장에 나가야 하기에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나서기 직전 옷을 다 챙겨 입은 아버지가 잠시 방에 눕더니 “아, 좋다”라며 나를 보고 빙긋 웃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생각하면 아버지이기 전에 편안함을 좋아하는 한 인간으로서 차디찬 새벽 공기가 그리 달갑지는 않았을 터다.그 후 우여곡절 끝에 무일푼으로 다시 시골에 내려와야 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데 이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시골에 내려왔지만 아버지는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야산 모퉁이를 빌려 3년여 동안 고생한 끝에 포도밭을 일궜다.마침내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수확할 때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산 주인이 다시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애초부터 남의 땅에서 그 고생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후 아버지는 술을 더 가까이 했고 대학생이 된 나는 더 이상 아버지와 대화를 하지 않았다.어쩌다 집에 가도 무덤덤하게 지내던 아버지와 나를 연결해 준 것은 결혼하고 낳은 첫 아이였다. 워낙 무뚝뚝한 성격의 아버지였지만 큰손자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다. 어느 날은 아이가 보고 싶다며 연락도 없이 서울로 오신 적도 있었다. 노란색 장난감 비행기를 안고서 말이다.아이가 있기 전보다 대화가 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와 가까워지지는 못했다. 문득 문득 삶에 대한 울분이랄까 후회랄까 아버지는 가끔 그런 슬픔을 술과 함께 한꺼번에 쏟아냈고 이를 받아들이기에 아직 나는 어렸던 것 같다.아버지는 계속된 술과 담배로 급기야 병원에 실려가고 암 말기 판정을 받아 중환자실에서 3개월 넘게 투병 생활을 해야 했다. 병원으로 옮긴 이후부터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어떤 대화도 나눌 수 없었다.돌아가시던 날 새벽, 연락을 받고 병원에 달려가 혼자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봤다. TV 드라마에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하던데 그것은 현실과 엄청나게 다른 것 같다. 아무런 말씀도 못하시고 아버지는 힘겹게 손을 놓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무슨 말씀인가 듣고 싶었지만 나의 바람은 영원히 이룰 수 없게 됐다.가난이 불만스럽기만 했던 고등학교 시절, 나는 아버지께 무능력하다고 원망하기도 했다. 어느 덧 마흔 무렵 나이를 먹고, 이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보니 세상일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비록 술꾼이었지만 아버지가 왜 그랬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어느 날 버스를 타고 퇴근하면서 창밖으로 즐비한 술집을 보다가 문득 떠올랐다. 아버지 모시고 술 한잔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그때 얼마나 나 자신이 원망스럽던지 나도 모르게 창밖을 보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이제야 아버지의 얘기를 소주 한잔과 함께 듣고 싶지만 들을 수 없게 돼 버렸다.민주영·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연구위원단국대 경영학과 졸업. 서강대 경영대학원 MBA 재학 중. 한국펀드평가 펀드 애널리스트, 머니투데이 기자를 거쳐 2006년부터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연구위원으로 각종 강연 및 집필 등 다양한 투자 교육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