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민고의 영어 학습 혁명

“자, 영화 찍을 때 ‘스탠 바이(stand by)’라고 하지. 움직이지 말고 가만있으라는 얘기지. 그러니까 바이스탠더(bystander)는 뭘까. 가만히 서서 구경하는 사람이지. 다음, 어뷰즈(abuse)는 사용하다의 유즈(use)와, 앱(ab)은 뭐야, 부정적인 의미지. 그러면 어뷰즈는 ‘잘못 사용하다’의 뜻이 되겠지.”지난 3월 23일 오후 1시, 의정부에 있는 경민고등학교 어학실에서는 영어 수업이 한창이었다. 이날은 영어 교과서 4과(Lesson 4)의 단어 98개를 익히는 시간이다. 이날 점심 급식으로 나온 ‘닭가슴살케첩조림’ 때문에 밥을 많이 먹은 학생들 가운데 한둘씩 조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조는 학생을 일으켜 세우고 수업이 계속 진행됐다.영어 선생님인 한성구 교사의 단어 설명이 20분간 이어진 뒤, 방금 설명을 들은 단어를 학생들이 익히는 시간. “이제 깜빡이를 들고 오늘 한 거 복습한다. 시간은 15분 줄게. 자, 숨김 기능 풀고 못하는 사람은 선생님이 도와줄게.” 한 교사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이 일제히 책상 위 게임기 모양의 하얀 물체를 집어 들고 이어폰을 낀다.이 하얀 물체가 바로 반복 어학 학습기인 ‘깜빡이’다. 화면에서는 ‘바이스탠더(bystander)’가 뜨고 이어폰에서는 ‘바이스탠더’라는 원어민 발음이 들린다. 처음 2초 동안 영어 어휘가, 다음 1초 동안 한글 풀이가 뜬다. 한 단어에 총 3초가 지나자 다시 새로운 단어가 나타난다. 자신이 아는 단어는 조작 버튼을 눌러 ‘숨기기’로 가린다. 그러면 반복 학습 때는 모르는 단어만 집중적으로 익힐 수 있다.한 교사가 설명할 때는 조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깜빡이로 학습할 때는 조는 학생이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15분이 지나자 한 교사는 “자 5분을 더 줄게. 다시 반복하자”라고 우렁차게 얘기했다. 단어당 3초, 총 100여 개의 단어가 1회 반복되는 시간은 300초, 즉 5분이다. 남은 시간이 지나자 교재의 문제 풀이가 시작된다. 방금 익힌 98개 단어의 뜻을 사지선다형으로 맞히는 문제다.이렇게 한 시간의 영어 수업이 끝났다. 경민고는 올해부터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3월 한 달 동안 교과서 본문 진도를 나가지 않고 1학년 교과서 전 단원의 단어만을 집중적으로 익히도록 하고 있다.이렇게 한 데는 의정부 지역의 열악한 교육 환경과도 관련이 있다. “의정부 지역 고등학교들이 지난해 10월 학업 성취도 평가에서 그리 좋지 않은 성적이 나올 정도로 교육 수준이 떨어져 있습니다.” 경민고 권연택 교장의 말이다.비평준화 고등학교인 이 학교는 중학교 수준의 영어 단어조차 충분히 학습이 안 된 경우가 많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고교 수준의 수업을 따라갈 리 만무하다. 그러다 보니 수업 시간에 흥미를 잃고 딴전을 부리거나 조는 학생이 많았다. 이를 고민하던 한 교사가 마침 깜빡이를 알게 돼 올해 전격적으로 도입한 것이다.“일단 게임기 모양을 하고 있어서 학생들이 관심을 보입니다. 조작하는 재미도 있고요. 그리고 깜빡이를 하는 동안에는 일단 단어에 한 번 푹 빠졌다 나오게 됩니다. 아무리 설명해 줘도 ‘자기주도학습’이 이뤄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거든요. 이렇게 사전 학습이 이뤄진 뒤 본문 진도를 나가면 자기도 모르게 단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아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아이들이 신기해 해요. 그러다 보니 공부를 포기했던 학생들도 조금씩 흥미를 갖기 시작하고 공부하는 재미가 붙습니다. 이것이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어요. 공부냐, 아니냐의 갈림길에서 공부 쪽을 선택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지요.”지난해까지는 1대의 깜빡이를 TV에 연결해 활용했지만 올해부터는 개인당 1대씩 활용할 수 있게 됐다. 깜빡이의 제조사인 원샷보카는 경민고의 요청으로 단원별 단어를 새로 집어넣었고 교재도 함께 출간했다. 이렇게 해서 공교육 맞춤형 학습 기능이 올해 처음으로 완성된 셈이다.공부를 멀리한 학생들도 ‘깜빡이’를 할 때만큼은 단어에 푹 빠졌다 나온다. 사진은 경민고의 영어수업 모습.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