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 뿌리내린 대안 화폐
민들레, 두루, 아리, 고리, 그루, 늘품. 이 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퀴즈, 대한민국’ 문제처럼 알쏭달쏭한 이 질문의 답은 ‘대안 화폐’의 이름이다. 앞서 언급한 것들 외에도 미래머니, 고잔머니, 그린머니, 송파머니 등이 있다.대안 화폐 쓰기는 시장경제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화폐 뒤에 가려진 ‘사람’의 모습을 되찾자는 일종의 공동체 운동이다. 사람 스스로가 만들어낸 상품이지만 화폐가 오히려 사람을 지배하고, 사람은 그것들을 신처럼 숭배하는 ‘물신화’는 자본주의 사회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마르크스가 일찍이 지적한 바 있다. 대안 화폐 자체가 지금의 자본주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물신화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은 사실이다.대안 화폐는 1983년 영국인 마이클 림튼에 의해 고안됐다. 캐나다로 이주한 림튼은 어느 날 돈이 떨어지자 ‘나는 일할 능력이 있는데 왜 돈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엔지니어답게 그는 ‘능력을 서로 주고받으면 밥은 먹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아이디어를 통해 상호부조에 기반한 대안 화폐 시스템을 고안했다. 이후 림튼은 영국으로 귀국한 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현재 영국은 가장 활발히 대안 화폐 운동을 펼치는 곳이 됐다.국내에서는 1998년 ‘대전21’의 박영남 사무처장이 ‘녹색평론’에 소개하면서 시작됐다. 최근 글로벌 금융 위기로 인해 시장경제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대안 경제가 눈길을 끌듯이 당시 국내에서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맞은 직후라 대안 화폐 운동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커지게 됐다. 1998년 ‘미내사(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라는 단체가 전국 단위로 회원을 모집해 대안 화폐 거래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2~3년 뒤 활동을 접었다가 최근에 재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곳은 대전 ‘한밭레츠’와 과천의 ‘과천품앗이’다. 대전 ‘한밭레츠’는 대안 화폐를 소개한 박영남 사무처장과 지역 의료생협 김성훈 간사가 주축이 돼 1999년부터 회원 모집을 시작해 2000년 창립됐다.대안 화폐에는 정해진 규칙이 없다. 100개의 대안 화폐 공동체가 있다면 100가지의 대안 화폐 시스템이 있는 셈이다. ‘한밭레츠’와 ‘과천품앗이’를 통해 대안 화폐의 개념을 파악해 보자.한밭레츠의 화폐 명칭은 ‘두루’다 ‘두루두루(널리)’ 쓰인다는 뜻이다. 1두루는 대한민국 통화 1원에 해당한다. 1000두루의 물품이 거래됐다면 판 쪽은 ‘플러스 1000두루’, 산 쪽은 ‘마이너스 1000두루’가 계정에 등록된다. 계정 등록은 주로 ‘두루를 받아야 할’ 판매자가 웹사이트를 통해 하게 된다.산 쪽은 두루를 지불해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판매한 사람에게 직접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에게 물품을 팔아 플러스가 되면 채무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 화폐와의 차이다. 또 두루에는 이자가 붙지 않는다. 지금 당장 두루를 지불하지 않아도 장래에 언젠가 두루를 벌면 되는 것이다. 이는 시장경제와 대안 화폐를 구분 짓는 중요한 차이다.‘대안 화폐’ 운동이다 보니 ‘이들이 쓰는 화폐는 어떤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먼저 든다. 그렇지만 실제로 종이에 인쇄되거나 금속 주조물 형태의 화폐가 실제로 유통되는 것은 아니다. 외국에서는 화폐를 직접 제작하기도 한다. 한밭레츠는 ‘두루’라는 이름은 있지만 모든 거래는 온라인 계정으로만 이뤄진다.한밭레츠 사무국을 맡고 있는 박현숙 실장은 “처음에는 종이 형태의 지폐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잘 갖고 다니지 않아 정작 필요할 때 사용하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두루를 찍기만 하고 유통이 되지 않아 실효성이 없었다. 그래서 온라인 시스템을 구축하게 됐다”고 연유를 설명했다.설립 초기 정보기술(IT)에 친숙한 젊은이들이 한밭레츠를 이끌었던 것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거래 시스템을 구축하게 된 계기가 됐다. 시스템이 업그레이드돼 지금은 개별 회원이 로그인한 뒤 자신의 거래 내역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전에는 사무국이 일일이 거래를 집계해 올려야 했기 때문에 두 달마다 개인의 거래 내역이 업데이트됐다. 한밭레츠의 거래 시스템은 대안 화폐 운동이 발달한 영국과 일본에서도 벤치마킹할 정도로 독보적이다. 자본과 전문가 없이 자생적으로 구축한 것이기 때문이다.두루 거래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의료(23.5%), 농산물(21%)이다. 해외에서도 의료 서비스를 대안 화폐 영역에 포함했다는 것에 놀라워 한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대안 화폐 참여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농산물의 경우 지역공동체 내에서 거래하기 때문에 안전성과 신뢰성이 보장돼 인기가 높은 편이다.한밭레츠는 화폐 유통과 시스템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상근자가 필요하다. 상근자의 임금은 의료생협의 지원금, 한밭레츠로 들어오는 후원금과 월 3000~5000원의 회비, 그리고 두루로 지급된다. 2008년 한밭레츠의 회원 수는 총 620명(586가구), 거래 건수는 1만569건, 거래 액수는 1억8115만3230원이다. 이 중 두루로 거래된 액수는 53%다.한밭레츠의 형태를 ‘레츠(LETS: Locally Exchange & Trading System)’라고 한다. 이와 달리 ‘과천품앗이’는 ‘타임 달러(Time Dollar)’ 형태다. 타임 달러는 물품 거래의 비중이 극히 적고 노동시간을 거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레츠가 상품·서비스의 거래 위주라면 타임 달러는 품앗이 개념이다.과천품앗이에서는 1시간 노동을 ‘1만 아리’로 계산한다. 노동을 통한 서비스를 1시간 단위로 거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A가 B의 집 하수도를 1시간 동안 수리해 주고, B는 자동차가 없는 C를 1시간 태워주고, C는 A의 아이를 1시간 도와주는 식이다. 역시 거래 상대방에게 화폐를 직접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이자가 붙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교사의 1시간과 주부의 1시간이 똑같이 매겨진다는 점이다.과천품앗이는 거래 내역을 통장으로 거래한다. 기여자, 수혜자, 거래 내용, 시간을 각자 통장에 적고 상대방의 서명을 받으면 거래가 성사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가 화폐로서의 기능하기 위해서는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거래 내역을 집계하는 일이 필요하다. 보통은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총회에서 데이터를 받거나, 또는 e메일로 받는다.이영희 과천품앗이 운영위원장은 “나는 품앗이 공동체를 통해 아이를 키웠다. 다섯 집만 모으면 1주일에 하루씩만 품을 들이면 육아가 가능하다. 5~7세까지 3년 동안 공동 육아를 했다”며 “한밭레츠가 의료생협을 통해 활성화됐다면 과천품앗이는 육아·교육을 통해 발달한 경우”라고 전했다.과천품앗이의 회원 수는 약 200명. 온라인 카페 가입 회원은 600명이 넘지만 신입 회원 교육을 이수해야 정회원으로 활동할 수 있다. 연 1만 원의 회비와 거래당 0.5%에 해당하는 아리를 운영비로 충당하고 있다.한밭레츠, 과천품앗이 외에도 1999~2000년에 전국적으로 대안 화폐가 활성화됐지만 대부분 시청, 구청 등 관(官) 주도로 이뤄지면서 지금은 유명무실화된 경우가 많다. 대안 화폐를 연구해 온 가톨릭대 천경희 교수는 “대안 화폐는 공동체의 신뢰를 바탕으로 스스로 필요성을 느껴서 시작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다. 관 주도로 할 경우 담당자가 전출가거나 단체장이 바뀌면 갑자기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고 조언하고 있다.대전·과천=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