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끼리 돈 빌리고 갚는 ‘P2P 금융’

지난 1월 영국 국립과학기술예술재단(NESTA)과 오픈비즈니스는 P2P 금융 연구 프로젝트(webank.org.uk)를 출범시켰다. 세계적으로 P2P 금융 관련 기업이 크게 늘어나는 최근 추세에 발맞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프로젝트의 명칭이다. ‘위 뱅크(We Bank)’. 평범한 보통 사람 개개인이 곧 은행이라는 선언이다. 기존 은행 시스템에 대한 강한 불신을 담고 있다. P2P 금융은 바로 은행 등 기존 금융회사의 중간 매개 없이 낯선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집단적으로 돈을 모아 대출해 주고, 투자하고, 환전해 보자는 새로운 실험이다.P2P 금융은 인터넷의 발달로 등장했다. P2P(Peer-to-Peer)는 본래 인터넷에서 중간 서버를 거치지 않고 개인과 개인이 직접 연결돼 파일을 공유하는 것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P2P 금융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금융회사를 거치지 않고 개인들이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맥락에서 P2P 금융은 ‘개인 간 직거래 금융(Person-to-Person Finance)’이나 ‘웹2.0 금융’, 또는 ‘사회적 금융(Social Finance)’으로 불리기도 한다. 중간 매개자를 배제해 ‘더 영리하고, 더 공평하고, 더 인간적인’ 금융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다소 황당해 보이는 이 모델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5년 영국에서 조파(Zopa)가 문을 열면서부터다. 이듬해 미국에서 선보인 프로스퍼(Prosper)는 큰 시장을 발판으로 급성장해 지금은 규모에서 조파를 앞지르고 있다. 미국 렌딩클럽(Lending Club), 독일 스마바(Smava) 등도 유명하며 국내에선 2007년 머니옥션과 원클릭이 설립돼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조파의 비즈니스 모델은 생각보다 잘 짜여 있다. 조파는 1998년 영국의 온라인 은행 에그(Egg)를 함께 시작했던 3명의 공동 창업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벤치마크캐피털, 베세머벤처파트너스 등 유명 투자회사에서 1600만 파운드(약 290억 원)를 투자 받았다. 현재 조파 회원은 26만 명에 달한다. 조파는 돈을 빌리려는 사람들의 신용등급을 A*, A, B, C, Y(영 마켓) 등 5개 등급으로 나눈다. 여기서 평가된 신용 등급은 대출 이자율에 반영된다. 만약 대출 신청자가 이러한 등급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조파를 이용할 수 없다. 이런 조파의 엄격한 사전 신용 평가는 부실채권 비율을 0.3%라는 경이적인 수준에 묶어둘 수 있는 비결이다.돈을 빌려 주려는 투자자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 분산 투자를 원칙으로 한다. 하나의 대출 신청에 10파운드(약 2만 원) 이상 투자할 수 없다. 만약 그 이상 투자하려면 10파운드 단위로 나눠 다수의 대출자에게 분산 투자해야만 한다. 또 개인별 투자 한도도 2만5000 파운드(약 4900만 원)로 제한하고 있다. 다수의 대출자가 동시에 상환 불능에 빠질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점에서 상당히 합리적인 구조다. 투자자의 수익률은 5개 등급 마켓 가운데 어디에 속한 대출자에게 투자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신용 등급이 높은 A*에 투자하면 부실 가능성은 없지만 낮은 수익률에 만족해야 한다.조파는 대출자들에게 118.5파운드(약 23만 원)의 수수료를 일률적으로 받는다. 하지만 조기 상환 수수료 등 기타 추가적인 수수료는 전혀 없다. 반대로 투자자에게는 매년 총투자 금액의 1%에 해당하는 서비스 비용을 받아 수익으로 삼는다. 이 밖에 보장보험을 팔아 추가 수익을 창출한다.조파는 부실 가능성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지만 이를 100% 막을 수는 없다. 실제 전혀 만난 적이 없는 낯선 사람에게 돈을 빌려줘야 한다는 부담도 여전하다. 또 은행 예금과 달리 조파 투자금은 원금 보장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조파를 통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데 열광하는 사람들에게 이는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장애인 아들에게 휠체어를 사주려는 어머니에게 도움을 줬다는 것에 더 뿌듯해 한다.키바(Kiva)는 P2P 금융의 또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 동아프리카 스와힐리어로 단합을 뜻하는 ‘키바’는 2004년 말 실리콘밸리의 프로그래머 부부에 의해 시작됐다. 간단히 말해 저소득층이 자활할 수 있게 창업 자금을 무담보로 빌려주는 마이크로크레디트를 인터넷으로 옮겨 놓은 형태다. 차이가 있다면 타지키스탄 페루 캄보디아 에콰도르 우간다 등 저개발국 창업 지망자들이 그 대상이라는 점이다.참여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홈페이지에 접속해 자신이 돕고 싶은 사람을 선택한 뒤 일정액(계좌당 25달러)을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된다. 이 돈은 창업 희망자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고 현지에서 활동하는 마이크로크레디트 단체로 보내진다. 중요한 것은 키바를 통해 후원자가 내는 돈이 기부금이 아니라 대출금이라는 것이다. 대출금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상환해야 한다. 후원자들은 자신이 빌려준 돈이 어떻게 쓰이고 빌려간 사람의 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홈페이지와 인터넷을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키바는 2005년 3월 우간다의 한 여성이 생선 가게를 차리는 데 필요한 500달러를 처음 대출한 뒤 지금까지 모두 40만 명에게 6000만 달러를 대출해 줬다. 놀라운 것은 대출금 상환율이다. 키바의 대출금 상환율은 97.5%를 기록하고 있다.셀어밴드(Sellaband)는 음악 유통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한다. 네티즌들이 돈을 모아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의 음반을 낼 수 있게 해 준다. 무명 음악가들은 셀어밴드에 음악을 올리고 사용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으면 음반을 낼 수 있다. 사용자들의 반응은 이들이 지불한 돈으로 평가된다. 셀어밴드에서 음악을 들어본 다음 마음에 들면 10달러를 기부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5만 달러가 모이면 셀어밴드가 음반 녹음을 위한 스튜디오와 경험 있는 음반 제작자를 제공한다.이렇게 만들어진 음반의 판매 수익은 투자자들에게 배분된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단순한 수익 배분만이 아니다. 훌륭한 음악가를 발굴했다는 자부심도 갖게 된다. 2006년 설립 이후 29개 밴드가 5만 달러 이상을 후원받아 앨범을 발매했다.어 스웜 오브 에인절스(A Swarm of Angels)도 비슷한 형태다. 하지만 이번에는 투자 대상이 영화다. 영화 제작자와 작가들이 모여 만든 오픈소스 영화 제작 프로젝트다. 100만 파운드의 기금을 모아 영화를 제작한 뒤 전 세계 100만 명이 온라인으로 무료로 내려 받도록 하는 게 프로젝트가 내건 목표다.미드포인트&프랜스퍼(Midpoint&Transfer)는 국제 공금과 환전에 P2P 금융 방식을 적용했다. 이용자 한 명당 최대 25만 파운드까지 환전을 요청할 수 있다. 일단 환전 요청이 들어오면 그에 맞는 환전 요청자들을 자동으로 매칭해 연결해 준다. 거래가 끝나면 환전 금액이 각 이용자가 속한 지역 은행 계좌에 입금된다. 일반 은행은 매매 기준율을 중심으로 1.5~2% 범위에서 환전 수수료를 챙기지만 미드포인트는 환전 금액에 관계없이 한번 거래할 때마다 30파운드의 수수료를 받는다.축구 팬들끼리 돈을 모아 아예 구단을 인수한 곳도 있다. 지난 2007년 축구 기자 출신인 윌 브룩스가 주축이 된 마이풋볼클럽(MyFootballClub)은 ‘2만 네티즌 모으기 캠페인’을 벌여 잉글랜드 5부 리그팀인 엡스플리트를 70만 파운드(약 14억 원)에 인수했다. 애초 이들은 유명 클럽을 포함해 15개 구단을 인수 대상으로 선정했지만 실현 가능성과 구단 재정을 고려해 7개로 압축했다. 운영진은 각 팀을 돌며 재무적, 영업적 현황에 대한 꼼꼼한 실사를 벌여 구단 상황을 파악하고 이를 네티즌에게 보고한 뒤 2만여 회원의 합의를 거쳐 최종 인수 구단을 결정한 것이다.현재 마이풋볼클럽의 회원은 세계 73개국 3만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1인당 1년에 35파운드(약 7만 원)를 내고 구단을 소유한다. 이들은 팀 전술이나 선수 계약, 구단의 결정에 찬반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