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P2P(Peer-to-Peer) 금융 업체 조파(Zopa). 2005년 설립된 이 영국 기업은 대공황 이후 최대 위기라는 요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글로벌 금융 붕괴로 은행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면서 인터넷을 통해 개인끼리 직접 돈을 빌려 주고 빌려 쓴다는 이 회사의 대안 모델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금융권의 몰락이 뚜렷해진 지난해 하반기에 여유 자금을 빌려 주기 위해 조파에 가입한 신규 회원은 전년 대비 81%나 늘었고 대출 중개 금액도 78% 급증했다. 올 들어서도 매달 신규 회원과 대출액이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다.P2P 금융 모델은 기존 금융회사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한다. 시장조사 기관인 미국 포레스트리서치에 따르면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은행이 소비자들의 이해보다는 자신의 이해를 우선하며 윤리적 경영을 하지 않고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은행들은 수많은 직원을 고용하고 점포망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을 소비자에게 떠넘기며, 요즘 전 세계가 극적으로 경험하는 것처럼 파괴적인 금융 공황을 불러오기도 한다.P2P 금융은 ‘사람이 은행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은행이 챙겨가는 예대마진(예금과 대출의 금리 차이)을 없애거나 대폭 줄임으로써 대출자는 더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고, 투자자는 더 높은 수익을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다. P2P 금융은 돈을 빌리고 갚는 ‘더 영리하고, 더 공평하고, 더 인간적인 방식’이라는 게 조파의 설명이다. 지난해 터진 글로벌 금융 위기는 이러한 조파의 강점이 부각되는 계기가 됐다.하지만 유리한 금리와 높은 수익률이 조파가 인기를 끄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상당수 조파 회원들은 은행을 배제하는 P2P 금융을 통해 보다 윤리적으로 돈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빌려 준 돈이 가져오는 긍정적인 사회적 영향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이자율보다 자선적 동기에서 조파를 통해 돈을 빌려준다. 반대로 돈을 빌린 사람도 꼬박꼬박 이자를 지불하는 대상이 탐욕스러운 은행이 아니라 ‘진짜 인간’이라는데 더 신경을 쓰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조파의 사례는 금융은 신뢰를 바탕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갚는 것이라는 소박한 진실을 일깨워준다.2005년 처음 등장한 P2P 금융은 이제 본격적인 도약기를 맞고 있다. 영국 국립과학기술예술재단(NESTA)과 오픈비즈니스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지난 4년간 P2P 금융 업체는 모두 30여 개로 증가했다. 특히 영국을 비롯해 미국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스웨덴 일본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온라인뱅킹리포트는 P2P 금융 시장 규모가 2010년 10억 달러, 2017년에는 9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최근에는 미국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가 P2P 금융을 ‘2009년 주목해야 할 비즈니스 아이디어’로 선정해 눈길을 끌었다. HBR는 인터넷과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가 P2P 금융 확산의 중대한 발판이 되고 있다고 분석하고 향후 5년 이내에 기존 주요 은행들이 P2P 금융 비즈니스에 뛰어들 것으로 전망했다.P2P 금융의 대표 주자인 조파의 성공 사례는 세계적으로 대안 경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이유를 잘 보여 준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는 수십 년간 세계를 지배해 온 ‘신화’의 붕괴를 의미한다. 세계경제의 성장이 끝없이 지속될 것이라는 환상, 최첨단 금융 기법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무너진 것이다. 위기를 통해 드러난 진실은 끔찍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에 따르면 지난 30년간 세계 93개국에서 무려 112번의 금융 위기가 발생했다. 세계는 만성적 불안과 불확실성 속에 위태롭게 서 있으며 금융 위기는 결코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바로 ‘상시 금융 위기의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대안 경제의 모색은 한국 경제의 현주소와 관련해서도 중요성을 갖는다. 한국은 그동안 대기업 중심, 수출 주도, 선진국 모방을 통해 놀라운 경제 기적을 일궈냈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경제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한국 경제를 업그레이드하고 10~20년 후 세계적인 산업 지형의 변화에 대응하려면 창조적 산업, 창조적 기업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 분야의 균형 잡힌 성장과 사회 소외 계층에 대한 배려도 필수적이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지역 공동체와 사회적 책임에 관심을 갖는 것은 결코 손실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라며 “희망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존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균형 감각과 역발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대안 경제 모델들은 유쾌한 상상력을 담고 있다. 끊임없이 진화한다. P2P 금융만 하더라도 단순한 대출 형태에서 벗어나 다양한 실험이 시도되고 있다. 쿠버라 머니(Kubera Money)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계’를 온라인에 접목한 모델을 준비 중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만들어진 키바(Kiva)는 인터넷으로 돈을 모아 저개발국 창업 희망자들에게 빌려준다. 축구 팬클럽이 돈을 모아 축구단으로 아예 인수하거나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에 투자하기도 한다.글로벌 금융 위기로 통화 정책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지역화폐 운동도 활기를 띠고 있다. 미국 미주리 주 북동부의 친환경 공동체인 ‘춤추는 토끼 환경마을’에는 ‘양상추 은행’이라는 지역은행이 있다. 주민들이 이 은행이 발행한 ‘그린(Green)’이라는 화폐를 이용해 물건을 산다. 지역 화폐 운동은 무너진 지역 공동체를 되살리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국내에서도 활발하다. 이 밖에도 마이크로크레디트(무담보 소액 대출)나 사회책임투자(SRI), 사회적기업은 정부와 기업, 금융권에서도 이미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는 분야다.물론 대안 경제는 끝없는 모색의 과정이다. 완벽하지도 않고 완성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의 상상력, 가능성의 지평은 그만큼 넓어지고 있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